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 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먹게 됐다. 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29번째 이야기. 기록의 도시 안동, 유교책판 이야기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다.
오백년 왕조를 이어간 왕의 일거수일투족은 사관이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한 사초가 되었다. 그것을 엮은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왕명을 출납하던 승정원에서는 국정을 미주알고주알 기록했다. 조선왕조실록의 사초이자 그 자체로 역사적 기록이었던 승정원일기는 조선의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기록이다. 두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우리가 조선시대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것은 가까운 과거라는 점도 있지만 이처럼 조선시대에 관한 기록물이 가장 많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의 언행을 세세하게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날씨나 천재지변 생활상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를 망라했기 때문에 조선시대를 기록한 백과사전과 같다. 왕은 절대로 자신에 대해 기록한 사초를 볼 수도 없었고 수정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것이 역사를 대하는 조선의 방식이었다.

기록은 인류역사의 바탕이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는 재구성될 수 없다.
왕의 언행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를 지탱한 생활철학이자 통치이념인 유교와 관련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보다 더 방대하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등의 사상이 널리 알려지면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은 그들의 언행과 문집이 기록으로 남겨져서 후대사람들의 삶의 철학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서책의 발간과 문집발간이 과거 어느 시대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대가 조선이었다. 고려시대는 기껏 '팔만대장경' 같은 불교문화가 융성했을 뿐이지만 조선의 성리학은 선비의 삶 뿐 아니라 온 백성의 생활과 정신을 지배했다.
사림(士林)에 묻혀 있다가 개혁을 위해 세상에 나온 선비들은 시와 산문을 썼고, 경제와 세상을 이끄는 경세법(經世法)에 대해, 세상을 이끄는 지혜에 대해 글을 남겼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시스템에 의한 방대한 관변기록물 때문이 아니다. '유교책판'으로 대표되는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선비들의 삶과 글의 궤적이 천문학적인 규모로 기록되고 문집으로 제작되어 전승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충(忠)과 효(孝)에 바탕을 두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을 생활철학으로 삼은 시대. 이렇게 확립된 유교적 도덕관은 오늘날까지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기본으로 작용한다. 흔히들 안동을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지칭하는 것은 안동이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완성한 퇴계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국과 달리 공자와 맹자 같은 성인을 맹목적으로 추존하지 않았다. 우리 곁의 선비, 퇴계의 사상과 삶의 궤적을 되살렸고 그들을 서원에 배향했고 문중의 어른들을 유림의 공의를 모아 문집을 출간해서 사회규범으로 삼았다.

'유교책판'(儒敎冊版)은 조선시대에 서책(書冊)을 발간하기 위해 목판에 판각한 인쇄용 책판을 말한다.
이 기록물은 조선시대 유교적 신념을 후대에 전하고 중요한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선택된 당대 출판시스템의 중요 증거물이다. 조선의 유학자들과 선비들은 자신들이 공부한 유교적 이념을 실천하고자 살아 온 현인(賢人)의 삶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이 후손들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문집을 발간했다. 이 문집을 발간하기 위해 목판에 글자를 새겨 넣은 문집의 출판원본이 책판이다. '유교책판'은 이러한 문집과 각종 서책 원판인 책판을 모아놓은 '컬렉션'을 지칭한다.
이 유교책판은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특별한 기록문화유산으로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이 유교책판은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내 장판각에 수장돼 관리되고 있다.
안동에는 병산서원과 도산서원, 하회마을과 봉정사 등의 세계문화유산 뿐 아니라 유교책판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같은 세계기록유산과 아시아태평양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편액' 등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함께 보유하고 있다.
이번 주에는 유교책판을 직접 확인하러 한국국학진흥원으로 향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1995년 전통문화유산의 조사연구를 통해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정신적 좌표를 확립하기 위해 설립된 국학전문 연구기관이다.
현재 국학진흥원 장판각에는 305개 문중과 서원과 개인 등이 기탁한 718종 6만6천500여점의 유교책판이 소장돼있고 편액은 1천279점이 있다.

사실 '유교책판'이라는 거창한 이름 대신에 서책 출간을 위한 목판 원본이라고 한다면 보다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대량출판이 가능해서 책 한 권 출간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게 된 요즘에도 일반인이 책을 출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교책판은 조선시대에 대중을 위한 서책을 인쇄하기 위해 원고를 공론에 의해 모아서 편집하고 엄청난 비용이 소비되는 책판을 제작하는 작업 전반을 아우른다.
각 문장과 서원 등에서 제각각 관리되고 있던 책판들을 기탁받은 국학진흥원은 항온·항습 시설을 갖춘 장판각을 지어 정기적인 훈증소독까지 하면서 책판의 영구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일반인은 장판각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일부 책판에 대해서는 유리수장고를 통해 내부를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유교책판은 대장관 그 자체였다.

유교책판 '컬렉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유학자들의 문집이다. 퇴계문집 등이 대표적이다. 문집은 유교적 이념으로 평생을 살았던 퇴계 등 유학자들의 삶의 궤적과 사상 그리고 문학 작품을 망라했다.
또 성리학과 예학서 등 유학의 기본 텍스트도 꽤 있다. 여러 문중의 족보도 유교책판에서 많이 보인다. 족보는 유교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의 이상호 박사는 "유교책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유교적 이념을 한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책판이 공론에 의해 출판한 집단지성의 산물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은 선비, 즉 유학자가 이끈 세상이었다. 그들은 선비의 숲, 사림(士林)이었다. 사림을 형성한 정몽주의 후학들이 영남선비들은 조선이 건국한 후 100여년이 지나 훈구파들을 대신, 개혁에 나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사화는 수많은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사림의 본향 영남의 선비들은 유교의 이념, 왕도정치 구현에 나섰던 이들의 삶을 기록하고 전승하고자 했다. 그것이 유교책판을 만들었다. 목판에 새긴 사상은 고칠 수가 없었고 목판 자체는 원본성이 있었다. 선비정신이었다.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 혹은 퇴계의 유적과 사상을 찾아나서는 선비순례길에서 느낄 수 있는 호젓함과 달리 국학진흥훤 관람은 우리 선비들의 삶과 사상을 담고 있는 유교책판은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조선이 기록의 시대였다면 안동은 우리 정신문화의 정수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도시로 다가왔다.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은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지만 일부 책판과 편액 등은 홍익의 집에 마련된 간이 전시실 바깥에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유교문화박물관에서는 유교와 유교이념에 상설전시관이 있고 특별전시실에서는 '선비의 죽음'을 소재로 한 특별전시도 열리고 있다.
선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다음의 경구가 눈에 들어왔다.
'유학자는 죽어 육신이 없어졌지만 그의 사상과 학문은 자손과 후학들에게 영원히 기억된다. 그것이 사이불후(死而不朽)이다. 죽는 것은 끝이 아니라 산 자의 생활과 정신속에서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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