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가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을 냈다. 지난해 계간 문예지 문학동네에 실렸던 것을 한데 묶었다.
4대에 걸친 딸들의 삶을 관통하는 작품이다. 택호인 삼천댁이라 불리지 않고 '삼천'이라 불리는 증조할머니부터 삼천의 딸인 박영옥, 영옥의 딸인 길미선, 그리고 미선의 딸인 이지연까지.
화자인 서른두 살 이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바닷가 작은 도시 '희령'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 살 때 마지막으로 봤던 할머니와 운명처럼 만난다.
"아가씨, 내 손녀랑 닮았어. 그애를 열 살 때 마지막으로 보고 못봤어. 내 딸의 딸인데"라며 영옥은 지연을 알아본다. 22년의 간극이 급속히 좁혀질 수 있었던 데는 유전(遺傳)이 한몫한다. 지연은 영옥이 '언제나 보고 싶은 사람'인 삼천의 생김새를 빼다박은 듯했기 때문이다.
소설이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지연이 새로 이사한 집과 할머니의 집은, 인구 10만 명이 안되는 도시라지만, 아파트 라인까지 같다. 열 살 때 열흘 동안 함께 한 게 마지막이었음에도 할머니의 따스한 온기를 기억하고 있던 지연은 조금씩 할머니가 살아온 이야기에 귀와 마음을 연다.
무엇보다 지연에게 친근감을 안겨준 건 자신과 많이 닮은 증조모 삼천의 사진이었다. 백정의 딸로 온갖 차별과 모멸의 시선을 견뎌온 삼천의 이야기는 이혼 이후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지연에게 동병상련의 힘이 된다. 특히 삼천의 곁에서 힘이 돼주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핵심인 '힐링캠프'의 시작이다.
할머니 영옥은, 그리고 영옥이 박스째 보관하고 있던 편지들은 지연에게 정서적 연대를 제안하는 이야기보따리가 된다. 명숙 할머니, 새비, 새비의 딸 희자가 시대를 넘어 스크럼을 짠다. 차별받고 소외돼 있던 이들, 그 연대가 질곡의 시대에 서로를 일으키고 지켜낸 힘이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도움은커녕 중혼을 했거나 외도를 했던 남편과, 딸을 아무 곳에나 출가시키고 집안을 돌보지 않은 아비의 훼방에도 이들은 꿋꿋이 살아낸다. "슬픔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것은 더 큰 슬픔의 힘"이라며 추천한 오정희 작가의 말은 적확하다. 특히 브로맨스 못잖은 삼천과 새비의 워맨스(Womance)는 친자매 이상의 우애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문득 '생강차'를 마시고 싶어진다. 전란의 혼돈 속에서 소설 속 인물들이 평화롭게 버텨낼 수 있던 공간으로 대구 비산동이 나온다는 것도 잠시 반갑다. 344쪽, 1만4천500원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