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일본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1895년 발생한 을미사변 '명성황후 살해 사건'이다. 1895년 10월 8일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의 왕비는 무참히 살해되었다. 시신은 경북궁 뒷산에서 불태워졌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외국인에 의해 한 나라의 왕비가 피살당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일본 정부는 사건의 초기부터 자신들의 관련성을 부정했다. 그러나 사건의 처리 과정은 주도면밀했다. 살해 사건에 가담했던 일본인들은 일본으로 송환돼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재판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그리고 을미사변의 발발 원인은 대원군과의 권력투쟁, 민심의 이반으로 몰아갔고 살해범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고 주장, 일본 정부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 없다고 항변했다.
최근 아사히신문 보도는 충격적이다. 보도에 의하면 일본 외교관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했던 것이 밝혀졌다. 조선의 왕비가 일본의 조선 침략 과정에서 살해된 사실이 명백해진 것이다. 의아한 것은 이 사실에 대해 한국 정부, 한국 시민단체가 무반응한 것이다. 을미사변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게 지금의 우리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인가. 한마디로 단언하기에 너무 복잡한 문제인 것 같다.
2006년 후쿠오카의 '쿠시다 신사'라는 곳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는 을미사변 당시 일본인 살해범이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 '히젠도'가 봉납돼 있었다. 신사의 대표 궁사는 '히젠도'를 보여주며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칼을 보자마자 뭔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게 조선의 심장을 찌른 칼이구나.' 을미사변의 일본 작전명은 '여우사냥'이었다. 작전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칼집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一瞬電光刺老狐)는 글을 새겨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일 관계는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과거사에 대한 냉정한 인식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거듭해야 된다는 명제를 누가 부정할 수 있으랴. 그런데 조선 왕비를 살해한 칼을 기념품처럼 보관하고 있는 일본 측의 행위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듯하다.
나는 그 뒤부터 히젠도 문제를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위해 반드시 해결하고 싶었다. 우선 나는 이용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최봉태 변호사와 '히젠도환수위'라는 단체를 구성, 우리 국민들과 일본 정부에 히젠도 처분 문제를 제기했다.
여러 사람들이 히젠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울분을 표명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국회에서도 여러 차례 움직임이 있었다. 19대 국회 이후 히젠도 처분 촉구 결의안이 3차례나 발의됐지만 본회의 의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 스스로도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슬픈 방증일 것이다.
아사히신문이 발굴한 편지에는 '호리구치 구마이치'란 외교관이 "진입은 내가 맡은 임무였다. (중략) 왕비의 살해가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매우 놀랐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사히신문 보도는 히젠도를 보았던 2006년의 울컥한 감정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히젠도는 한일 양국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논의돼야 할 '시대적 과제'이다. 국회는 조속히 '히젠도 처분 촉구 결의안'을 의결해 주기 바란다. 나아가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히젠도의 적절한 처분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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