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참담한 여야 대선주자들의 선거운동

유광준 서울뉴스부 차장

유광준 서울뉴스부 차장
유광준 서울뉴스부 차장

"대한민국에서 오신 국회의원 두 분을 소개합니다. 한 분은 서울경찰청장을 지내셨고, 다른 한 분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고위 외교관 출신이십니다."

먼 훗날 '통일 시대'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말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주인공은 국민의힘 소속 김석기(경북 경주시)·태영호(서울 강남구갑) 국회의원이다.

두 의원은 지난해 12월 3일부터 약 2주일 동안 재외국민 투표 참여 독려와 국민의힘 지지 호소를 위해 미국 전역을 함께 순회했다.

국민의힘 재외동포위원장인 김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후보와 재외동포 설득 필요성에 공감하고 방미 길에 오르면서 태 의원을 파트너로 낙점했다.

김 의원은 "최소한의 인원과 비용으로 방미 팀을 꾸려야 했기 때문에 외교관 출신으로 해외 무대에서 수완을 발휘해 온 태 의원의 역량이 필요했고, 생각보다 미국에 북한이탈주민이 많다"고 발탁 배경을 설명했다.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기회가 되면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감흥을 나누고 싶었다. 편협한 진영 논리에 찌들 대로 찌든 역대 최악의 대선 국면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역설적이다. 국내 대선 전투에선 편 가르기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주장이 난무하는데 제1야당이 재외동포를 설득하기 위해 보낸 팀은 남북 공조까지 이뤄내고 있으니 말이다.

민족 최대 명절인 설 연휴 동안 고향에서 이 사연을 가지고 지인들과 얘기를 나눴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에피소드에 신기해하는 반응이었지만 이내 분위기는 통일과 한반도 긴장 완화 정책에 대한 난상 토론으로 이어졌다.

다양한 얘기들이 오갔지만 '통일은 아직 잘 모르겠고 국민들이 온전하게 경제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부분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며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민족 분단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이는 없었다. 격세지감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지불을 통한 구매 방식의 통일 방안을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의 사회 지도층에게 일정한 금전적 보상을 하고 북한 체제를 흡수하자는 논리다. 북한의 56배가 넘는 우리 경제 규모는 물론 매년 투입되는 국방 예산과 남북 갈등 비용 등을 고려하면 손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사실은 이런 황당한 주장을 내놓는 이가 현재 대선판을 누비는 여야 대선 주자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경쟁 후보의 처가나 가족사를 파헤치는 데 여념이 없는 여야를 향한 민심의 거침없는 하이킥이 아니었나 싶다.

제20대 대통령선거 투표일까지 30여 일밖에 남지 않았다. 여전히 거대 양당의 대선 후보들은 자기 눈 밑의 들보는 외면한 채 상대 눈 밑의 티끌을 지적하기 바쁘다.

이렇다 할 정책 토론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대로 가면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들어서기가 두려울 것 같다. 어떤 후보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특정 후보가 싫어서 경쟁 후보를 찍는 투표로 나라의 미래를 열 수 있을까!

혹자는 이러한 기성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이번 대선을 통해 확실하게 표출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는다. 이른바 제3지대 후보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나리오다.

거대 양당은 믿고 있을 것이다.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유권자들은 거대 양당 지지로 쏠린다는 역사적인 경험을. 하지만 지금은 서른여섯 살의 0선 국회의원이 제1 야당의 당수가 되고 직전 직업이 검찰총장인 인사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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