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영화 ‘나일 강의 죽음’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케네스 브래너 경은 셰익스피어 영화로 처음 영화계에 등장했다.

'헨리 5세'(1989)로 데뷔한 이후 '헛소동'(1993), '햄릿'(1996) 등 영국의 자랑인 셰익스피어 희곡을 영화로 옮기면서 영화계에 뿌리를 내린 가장 성공적인 감독이자 배우이다. 2012년에는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각색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재기발랄한 대사와 인간의 본성을 뒤흔드는 서사, 웅장한 스케일은 자칫 타인의 입방아에 오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시각적 재능을 입혀 영화화에 성공하면서 오랫동안 셰익스피어 전문가로 이름을 높였다. 이때가 30대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출판된 저작물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많이 출판된 것은 뭘까. 바로 '추리의 여왕'인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이다. 50대 후반이 된 케네스 브래너가 또 다른 영국의 자랑, 아가사 크리스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이다. 본인이 감독하고 주연까지 맡았는데, 그가 맡은 배역이 뾰족 수염의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였다.

두 번째 시도가 '나일 강의 죽음'(감독 케네스 브래너)이다. 1937년에 발표한 동명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으로, 1978년 '나일 살인 사건'(감독 존 길러민)의 '케네스 브래너식 재해석' 버전인 셈이다.

나일 강 위의 호화 유람선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 유람선에는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은 리넷(갤 가돗)이 신혼여행 중이었는데 바로 리넷이 관자놀이에 총을 맞아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동행하던 이들 대부분이 리넷과 우호적이지 않아 모두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가장 유력한 것이 리넷의 연적이었던 재클린(에마 매키)인데, 그녀는 알리바이가 명확하다. 그렇다면 누가 범인일까.

열차 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그린 '오리엔트 특급 살인'처럼 '나일 강의 죽음' 또한 강 위에 떠있는 유람선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살인이 일어난다. 교묘한 트릭이 숨겨진 사건을 파헤치면서 포와로의 추리가 시작된다.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나일 강의 죽음'은 127분의 러닝 타임의 절반인 1시간이 지나서야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그동안 영화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별이 가득한 나일 등 1930년대 풍경을 충실히 묘사한다. 특히 현재는 댐 건설로 옮겨진 아부심벨 신전 앞에 유람선을 정박하고 관람하는 당시 풍경이 인상적이다. 경쾌한 재즈 음악과 댄스 파티도 낭만적이고, 리넷 역을 맡은 갤 가돗의 등장과 존재감도 압도적이다.

'나일 강의 죽음'은 추리영화에 대한 고전적인 맛을 주는 영화다. 당시 음식과 소품, 의상 등도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 또한 크다. 범인을 쫓는 다재다능한 셜록 홈즈의 탐정극과 달리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은 '누가' 범인인가와 함께 '왜?'라는 살인 동기가 큰 밑그림이 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또한 과거의 충격적인 사건이 모티브가 된다. 이는 차가운 추리 이면에 뜨겁게 공감되는 동기를 배치해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극을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해준다.

'나일 강의 죽음'에는 사랑이 있다. 가난하지만 너무나 사랑한 연인이 있었다. 재클린과 사이먼(아미 해머)이다. 그러나 재클린은 미모와 돈이 있는 친구 리넷에게 사이먼을 빼앗긴다. 재클린은 둘을 스토킹하면서 저주를 퍼붓는다.

1978년 영화에서는 미아 패로가 재클린 역을 맡았다. 사랑과 증오에 휩싸인 미아 패로의 심리 묘사와 히스테릭한 연기가 압권이었다. 그러나 '나일 강의 죽음'에서 재클린은 비중이 크지 않고, 배우 또한 무명에 가깝다. 그래서 뜨겁고 위험한 애증을 표현하지 못한다. 결국 사랑이 빚어낸 비극미가 없는 속물적인 치정극이 되고 만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이렇게 흘러가는 가장 큰 것이 포와로에 대한 이질감과 그 역을 맡은 케네스 브래너의 과시욕 때문이 아닐까. 사실 케네스 브래너의 포와로는 탐정이 아닌 '수사반장' 같아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게 한다. 포와로는 작고 땅딸막하다. 진지하지 않으며 우스꽝스럽게 용의자를 닦달하는 허허실실 인물이다. 1978년 작에 등장하는 피터 유스티노프가 그런 이미지를 준다.

그러나 케네스 브래너가 연기한 포와로는 자신의 상처에 힘겨워하며, 과거에 잃은 사랑 때문에 눈물까지 짓는다. 포와로가 낫처럼 뾰족한 수염을 왜 길렀는지에 대한 설명 또한 군더더기다. 결국 살인의 전말에 대한 치밀하고 치열한 묘사 대신 포와로의 서사에 비중을 둔 것은 케네스 브래너의 '재해석'에 대한 과욕으로 읽혀진다.

"아, 사랑. 이 얼마나 위험한가"라는 대사를 내뱉는데, 재클린에 대한 연민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희석된다. 케네스 브래너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햄릿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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