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방송국에 갔을 때 일이다. 방송 전 대화를 나누던 관계자가 하소연을 했다. 야심 차게 기획한 프로그램이 첫 방송 후 '엎어졌다'는 것이다.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비교 분석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캠프 인사들을 초대해 열띤 토론회를 가졌지만 단 한 번으로 끝이 났다고 한다. 요즘 말로 '폭망' 수준의 시청률 탓이었다. 그 나름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기획한 프로그램이었지만 방송계 속설처럼 '시청률에 장사 없는' 법이다. 정책 토론에 대한 시청자들의 무관심이 그 정도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는 방송 관계자의 한탄이었다.
비슷한 일을 신문사 근무 시절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선거 때마다 언론들은 후보들에게 '정책 선거'를 주문한다. 정책 검증단을 운영하고 각 후보의 정책을 비교·분석하는 기사를 싣는다. 문제는 방송과 마찬가지로 신문에 실리는 정책 기사에도 유권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 지면에 대한 열독률 조사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언론이 말초적 사안은 크게 보도하면서 후보들의 정책은 홀대하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앞선 얘기처럼 유권자들의 무관심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국민이 관심을 갖지 않는 정책 보도를 언론이 열심히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불구경과 싸움 구경처럼 재미있어야 하는데 '정책'은 왠지 어렵고 따분한 게 사실이다. 사람을 모으는 데 한계가 있다.
다른 요인들도 있을 수 있다. '수도 이전' '무상급식'처럼 관심을 끄는 대형 공약도 없고, 후보 간 정책적 차별성이 없는 점도 원인일 것이다. 국민이 원하는 모든 걸 다 해주겠다는 후보들의 사탕발림이 넘치지 않는가. 근본적으로는 유권자들이 현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공약은 선거용일 뿐 선거 후 실제 삶이 달라지는 게 별로 없는 것을 유권자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공약을 실천하려다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도 안다. 현 정부의 부동산, 탈원전, 최저임금 등이 그런 부류일 것이다.
후보들마다 내세우는 부동산 공약은 그래서 걱정이다. 아파트 수백만 채를 지어주고, 청년층에게 싼값에 공급하고, 대출 규제를 대폭 완화하겠다는 등 대동소이하다. 가능한 얘기인가. 공약대로 실천하려다가는 주택값 폭락, 가계 부채 폭증 등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현 정부에서 파괴된 부동산 시장원리를 복원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이재명 후보의 전 국민 기본소득, 청년·문화예술인·농어촌 기본소득 등 '기본 시리즈' 도입 방침도 문제이다. 많아야 1인당 연 100만 원은 '소득'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푼돈이지만 실현하려면 천문학적 금액이 필요한 까닭이다. 소상공인·자영업자의 빚을 세금으로 탕감하겠다는 '빚 탕감' 공약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이후만 따져도 150조 원, 자영업 손실을 다 보전하려면 40조~50조 원이 더 든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석열 후보의 '병사 월급 200만 원' 공약을 이행하려면 부사관, 장교들의 월급도 연쇄적으로 올려야 한다. 지금처럼 빠듯한 국방 예산에서 실현이 어렵다는 것은 정밀한 계산 없이도 알 수 있다. '사드 추가 배치'도 문제작이다. 안보 얘기가 아니다. 첫 사드 포대를 성주에 배치하려 우리 사회가 얼마나 큰 갈등을 겪었는지 똑똑히 본 바 있다. 사드 추가 배치 공약을 이행하려 한다면 어떤 비용을 치를지 모를 일이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이런 공약들에 유권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비호감 선거라는 말이 일반화될 정도로 이번 선거는 극심한 분열 상태에서 치러지고 있다. 정파만이 아니라 국민까지 진영으로 찢어 놓고 있다. 주술, 무당, 부패 몸통 등의 단어만 부각될 뿐, 당과 후보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관심을 끌지 못한다. '정책 선거'란 말은 그래서 증오심만으로 찍지는 말자 정도 아닐까 싶다. 정당도 보고, 인물도 확인하고, 정책도 살핀 후 종합적인 판단을 하면 좋겠다는 말이다. '차악도 없는 선거'라는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솔직히 자존심이 상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정치 수준은 국민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우선 유권자들부터 정신을 차리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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