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지나 봄으로 가는 길목이어서일까. 파릇파릇 초록빛 녹음이 그리워지는 계절에 청춘 멜로 하나가 유독 눈에 띤다. tvN 토일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다. 자우림이 부르는 동명의 노래가 썩 잘 어울리는 이 청춘멜로에 시청자들이 설레는 이유는 뭘까.
◆'응답하라 1998' IMF 시절로
복고는 결국 현재의 어려움 때문에 과거의 가장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는데서 생겨나는 트렌드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응답하라 1997'의 '1997'이라는 숫자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그건 다름 아닌 IMF 직전, 별 일 없이 살 것만 같았던 그 시점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숫자이기 때문이다. 성장을 향해 무한 질주하며, 압축성장의 신화를 만들었던 한국사회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통해 거품을 터트리며 제동이 걸리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응답하라 1997'이 방영됐던 2012년부터 10년이 지난 2022년은 어떨까. 당시 복고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현실의 팍팍함은 조금 나아졌을까. 그렇지 않다. 그잖아도 고도 성장기를 지나 극도로 양극화된 현실 속 '수저로 미래가 결정되는' 성장의 사다리가 끊겨버린 사회에서 청춘들은 'N포세대'라는 이름으로 많은 걸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주했고, 조기 명퇴로 일터에서 밀려난 중년들은 불혹의 나이에도 세파 앞에 흔들렸다. 거기에 코로나19라는 글로벌 감염병이 겹치면서 드라마 속 '디스토피아'가 마치 현실에서 재현되는 듯한 불안감이 사회를 집어 삼켰다.

tvN 토일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또다시 1998년, 이제 막 IMF가 터진 후를 소환해낸 건 '응답하라 1997'이 방영됐던 10년 전과 지금의 현실이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만화 '풀하우스', 미국 직배 영화에 맞서 스크린쿼터를 요구하는 영화인들의 시위, 통화연결음이 떠오르는 PC통신, 지금은 사라져버린 비디오 플레이어와 테이프, 금 모으기 운동, 이제 막 태동한 힙합 음악, 만화 대여점…. '스물다섯 스물하나' 역시 '응답하라 1997'처럼 당대의 추억을 소환시키는 다양한 문화적 소품을 등장시킨다.
그런데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응답하라 1997'과 사뭇 다른 건, 시대에 대한 남다른 대결의식이다. '응답하라 1997'은 당대의 문화적 풍경들을 가져와 그 안에 청춘들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가족애를 따뜻하게 담아내는데 머물렀다면,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그 IMF라는 구체적인 현실이 만들어내는 시대의 무게와 정면으로 부딪쳐 싸우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인 나희도(김태리)와 백이진(남주혁)은 바로 그 시대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는 인물로 등장한다. 어려서 펜싱으로 신동 소리까지 들었지만 슬럼프에 빠져 연전연패를 기록하고 있는 나희도(김태리)는 어느 날 코치로부터 IMF 때문에 펜싱부가 해체된다는 통보를 받는다. 하지만 나희도가 가진 펜싱에 대한 꿈을 비현실적인 도전으로 치부하는 엄마는 차라리 이참에 포기하고 공부를 하라고 한다.
한편, 백이진은 IMF로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제 대학생으로 저 혼자 버텨내기도 힘들지만, 그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동생만이라도 챙기려 애쓴다. 즉 1998년이라는 시대의 무게는 나희도와 백이진이라는 청춘을 짓누른다. 그런데 이 암담한 상황 속에서 청춘들은 그 나이대가 갖는 풋풋함과 씩씩함으로 시대와 정면승부를 한다. 그래서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시대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 무채색을 컬러로 만드는 밝은 기운들로 채워진다.

◆청춘 멜로와 시대의 무게감 사이의 균형
바로 이 지점은 이 청춘멜로가 가진 색다른 성취다. 즉 자칫 청춘들의 달달한 사랑과 우정 이야기를, 순정만화를 보는 듯한 설렘과 기대로 채워 넣다 보면 지워져버리는 시대의 무게감을, 이 청춘멜로는 정면으로 끌어낸다. 이전 세대에 의해 부과된 삶의 어려움이 당대의 청춘들에게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가 하는 점은, 백이진의 자취방에 아버지의 부도로 인해 그 가족들 또한 고통을 겪고 있는 빚쟁이들이 찾아와 멱살잡이를 하는 장면으로 아프게 그려진다. 그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백이진은 울먹이며 이렇게 사죄한다. "저도 절대 행복하지 않을 게요. 아저씨들 고통들 생각하면서 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떤 순간에도 정말, 어떤 순간에도 정말 행복하지 않을 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없이 암울해질 수 있는 백이진 앞에 놓인 만만찮은 현실을, 드라마는 마치 '시대와 싸우는 듯' 대책 없이 긍정적인 나희도를 통해 다시금 발랄하고 경쾌하게 돌려놓는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희도가 "어떤 순간도 행복하지 않겠다"는 그 말에 자신은 반대한다며 이렇게 말해줘서다. "시대가 다 포기하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행복까지 포기해? 근데 넌 이미 그 아저씨들하고 약속했으니까 이렇게 하자. 앞으로 나랑 놀 때만 그 아저씨들 몰래 행복해지는 거야."
대책 없는 낙관이고 뜬금없는 멜로적 달달함이지만 이상하게도 나희도의 이런 말들이 기분 좋게 들리는 건 그것이 바로 '청춘의 특권'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세상물정 몰라도 '함부로' 낙관할 수 있는 힘. 백이진은 나희도의 말이 현실적이라서가 아니라 자신도 그렇게 함부로 막 얘기했었던 '열여덟의 나'를 떠올리는 것으로 위로받는다. 즉 당시에는 아주 사소한 것들조차 두려운 걱정거리들이었지만, 지나고 나면 그것조차 그리워할 때가 온다는 걸 백이진은 나희도를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 그리고 백이진이 느끼는 위로는 고스란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전해진다. 지금의 어려움도 지나고 나면 언젠가 농담처럼 그리워하며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는 전언.

◆권도은 작가의 필력서 김태리의 연기까지
사실 김은숙 작가의 보조작가 출신으로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로 입봉한 권도은 작가는 당시 이 작품이 좋은 반응에도 불구하고 표절 논란에 휘말리면서 아쉬움을 남긴 바 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지만 어쨌든 논란 자체가 오점을 남긴 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후속작인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시작 전 반응이 썩 긍정적이지만은 못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권도은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전작에 남겨진 아쉬움들을 상당 부분 해소시킬 것으로 보인다. 지난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서 느껴지는 권도은 작가의 장점은, 매력적인 캐릭터를 잘 만들어내고 톡톡 튀면서도 무게감을 담아내는 대사에 있다.
또한 이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찰떡 같이 소화해내는 배우들의 연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30대의 나이에 고등학생 연기를 아무런 이물감도 느껴지지 않게 잘도 표현해내는 김태리는 이 작품에 시청자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여기에 청춘의 풋풋함과 현실의 무게감을 잘 녹여내는 남주혁이나, 펜싱 코치지만 인생 코치 같은 명언들을 쏟아내는 양찬미 역할의 김혜은, 신인이지만 볼수록 매력적인 최현욱, 이주명, 보나 같은 연기자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코로나19가 시작된 지 벌써 3년,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이 팬데믹 상황 속에서 대중들은 지쳐가면서도 어떤 희망을 꿈꾼다. 마침 겨울을 지나 봄으로 가는 시점이라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이 풋풋한 봄날의 초록을 닮은 청춘들의 멜로에 유독 가슴이 설렌다면, 잠시나마 피곤한 일상을 내려두고 그 속에 푹 빠져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어쩌면 거기서 위로를 넘어 어떤 희망까지 발견할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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