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진입을 명령하기 전 무려 1시간 동안 TV 연설을 했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자세만큼이나 내용이 위압적이었다. CNN은 '광기'(Madness)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푸틴은 21세기 스트롱맨(Strong man) 시대를 열었다. 취임 뒤 언론·야당 탄압, 이웃 국가 침략 등 옛 소련의 '관행'을 거리낌없이 부활시켰다. 냉전 종식 이후의 세계 규범 따위는 '차르'(황제)라 불리는 그에게 전혀 걸림돌이 아니었다.
20년 넘게 권좌를 지켜온 비결 중 하나는 러시아를 우선시하거나 최소한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애국주의 마케팅 덕에 그는 종신 대통령까지 넘본다. 안보 불안감, 초강대국으로 재부상은 70% 가까운 국정 지지율의 바탕이다.
물론 이번 사태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양국 역사를 빼고 말할 순 없다. 심지어 러시아어에선 국가를 지칭할 때 장소 전치사로 'в'(브)를 쓰지만 우크라이나만큼은 지역 이름 앞에 붙이는 'на'(나)를 쓴다. '러시아에서'는 'в России'(브 라시이), '벨라루스에서'는 'в Беларуси'(브 벨라루시)이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на Украине'(나 우크라이네)가 일반적 표현이다.
한마디로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한 지방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침공 이후 러시아에서도 반전 여론이 일고 있지만, 최근 CNN 여론조사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가입을 막기 위한 무력 사용은 정당한가'라는 질문에 러시아 응답자 절반이 "그렇다"고 답한 배경이기도 하다.
불똥은 한반도로 튀어 안보·외교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서방세계와 러시아·중국의 충돌은 분단국가이자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인 우리로선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는 탓이다. 신냉전이 몰고 올 파장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당장 북한은 27일 탄도미사일을 쐈다. 중국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다시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코앞에 닥친 우리 대선과 북미 관계에 영향을 끼치려는 술수일 터다. 하지만 정부는 "엄중 유감" 입장만 내놔 국민을 불안케 한다.
푸틴의 장황한 연설과 서방국가 및 유엔의 대응을 보면서 2009년 미국 뉴욕 유엔총회에서 지켜봤던 또 한 명의 '독재자'가 떠올랐다. 규정 시간을 훨씬 넘겨 96분간 독설을 퍼부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였다. 3차 세계대전 가능성을 언급하며 군사 개입에 선을 그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을 위시해 국제사회가 경제 제재 외엔 대응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당시 카다피는 유엔 출범 이후 회원국들의 단합된 행동이 이뤄지지 않아 65차례의 전쟁이 발발했음을 지적하며 유엔이 국제 분쟁을 막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유엔 헌장 사본을 들고나와선 "이 문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기도 했다.
약육강식이 판치는 정글 같은 국제 무대에서 국가 안전을 담보하는 것은 결국 국력뿐이다. 북한이 공격해도 국제사회가 우크라이나 사태처럼 무력할까 봐 두렵다. 우리가 혈맹이라 믿는 미국엔 북한의 뒷배인 러시아·중국과 전면전을 벌일 동기가 있을까?
며칠 뒤면 대한민국을 이끌 새 대통령이 선출된다. '인터벨룸'(interbellum·전쟁과 전쟁 사이 시기를 뜻하는 라틴어)이 끝나 가는지도 모를 형국이라 유권자들의 현명한 판단이 절실히 필요하다. 러시아 격언 중에는 '어제의 일로써 현명해지는 것은 쉽다'는 말도 있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