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나도 크리에이터

김영필 철학박사

김영필 철학박사
김영필 철학박사

20년 전 터키를 세 번 다녀왔다. 패키지가 아니라 몇몇이 모여 관광지를 중심으로 다녔다. 이스탄불과 에베소, 이즈미르, 안탈리아 등이다. 옛 그리스 식민도시였던 밀레토스에서는 그곳에 온 한국 여행객들 앞에서 서양철학의 요람인 밀레토스학파를 소개했던 기억도 난다. 이즈미르에선가 하룻밤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신전과 소크라테스의 동굴을 다녀왔다.

내가 유튜브를 찾은 것은 이제 겨우 넉 달 정도다. 그동안 굳이 유튜브를 피한 것은 시간이 많이 빼앗길 것 같아서다. 아니나 다를까, 나이 칠십에 하루 대부분을 그곳에 코를 박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은 글로벌 여행공간이다. 내가 인터넷을 통해 대면하는 공간은 현실이 아니다. 내가 직접 가서 여행을 다니는 오프라인 여행이 아니다. 비대면의 온라인 여행이다. 그런데 마치 내가 직접 여행을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한다. 난 이 가상공간에서 특정한 곳을 여행하고 싶으면 찾아서 떠나고, 싫으면 다른 공간으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그러면서 나 역시 나만의 세상을 그리는 가상세계의 크리에이터가 된다.

가상현실은 말 그대로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비현실과는 다르다. 물론 현실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가상현실 역시 비현실이긴 하다. 그러나 가상현실이면서도 마치 현실과 똑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현실을 초월해 있으면서 현실에 직접 영향을 주는 초현실주의(쉬르-레알리즘)를 연상케 한다.

영화 '트루 시크릿'(2018)은 50대 여교수 클레르가 젊은 남자와 가상공간에서 사랑을 나누는 내용이다. 자신의 남편이 자신의 조카 25세 클라라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운 것이 원인이 돼 이혼한다. 이에 대한 복수의 심정으로 그녀 역시 조카 이름으로 계정을 개설해 젊은 남친과 온라인에서 열애에 빠진다. 하지만 결국 서로 대면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자신의 소설 속으로 공간을 옮겨 가상의 사랑을 이어간다. 영화 '그녀, Her'(2013) 역시 남자 주인공 테오도르가 인공지능 시스템인 가상의 여인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다룬다.

나 역시 온라인 여행과 사랑에 빠져 있다. 내가 가장 많이 찾는 사이트는 한 40대 남성 여행가의 공간이다. 그는 남극을 최종 목적지로 2031년까지 10년간 249개국 여행을 계획한 크리에이터다.

그는 지금 터키여행 중이다. 그가 최근 소개해준 터키의 '카쉬'라는 도시는 중국 최남단 해안 도시 샤먼(厦門)과 중첩된다. 유럽형 작은 카페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서로 닮았다.

난 이렇게 온라인에서 내 나름의 세상을 만들면서 자유롭게 여행한다. 내가 크리에이터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여행을 즐긴다. 마치 클레르가 가상현실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사랑을 나눈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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