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안강읍 옥산초등학교는 115년 전 일제 침탈에 맞서던 조선 민족주의자들이 국민 계몽을 통한 부국 강병을 꿈꾸며 세운 학교다.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병조약)를 전후해 국내 정세는 매우 혼란했다.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속국화하고자 조일 제1차협약을 맺은 후 정치 고문관을 파견했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항일운동이 불붙었다.
1906년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을 위한다며 통감부를 설치했고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과 고종 강제 퇴위, 군대 해산, 행정·사법권 이양에 이어 결국 1910년 한일합병에 처했다.
이에 앞서 경주 안강에서는 조선의 역사적 비극기를 지켜보던 옥산문중 지도자들이 현대적 교육이 불가능한 서당 대신 신식 교육기관을 설립키로 결의했다. 여주 이씨 잠계 이전인 선생의 12대손 이병유 종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아는 것은 힘이다. 힘 있는 민족만이 살아 남을 수 있으니,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교육으로 청년 인재를 양성하는 길 뿐"이라고 판단, 1907년 10월 4일 이병유 선생이 소유한 경주군 강서면 옥산리 1550번지에 와가 3동·초가 1동 규모의 4년제 경주사립옥산학교를 열었다.
이병유 선생과 이기호 교장 등 21명이 재원을 마련해 학교를 공동 운영했다.
1909년 경주군수가 교감에게 보낸 '옥산서원이 출자한 논 몇 두럭에서 나온 수익금을, 학교 운영 경비에 적절하게 사용할 것'이라는 훈령 제57호가 현재 옥산 정사독락당에 보관돼 있다.
당시 지은 경주사립옥산학교 건물은 현재 옥산1리 동회관으로 사용중이다.
1911년 경주사립옥산학교 학생수는 50명을 넘었고 1923년에는 학제를 6년제로 개편했다.

1944년에는 학교가 사립에서 공립으로 바뀌면서 당시 한국인이던 이정덕 교장 대신 일본인 다나까 교장으로 교체됐다. 1년 뒤 해방을 맞자 다시 이정덕 교장이 취임했다.
1949년 옥산국민학교와 하계국민학교가 옥계국민학교로 병합된 후 교정이 안강읍 옥산리 1116번지 현 위치로 이전했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반발하자 학교에 큰 변고가 생겼다.
치열한 안강전투로 인해 학교가 파괴될 것을 우려한 당시 교감이 모든 학교 문서를 자택으로 옳겼으나 도리어 자택이 폭탄에 맞아 완전히 소실된 것이다.
이로 인해 옥산초교는 1950년 이전의 모든 학교 행정뿐 아니라 졸업생 수 조차 알수 없게 됐다. 현재는 졸업생 수를 대략 8천~9천명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1963년 옥산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1970년대 초 학교 진입로가 기역(ㄱ)자로 불편하자 학교와 동문들이 지주를 설득, 부지를 기부 받은 뒤 마을 사람들이 지게와 손수레를 이용해 도로를 직선화한 미담도 전해진다.

1981년 병설유치원이 개원했고 2000년 하강분교를 통합한 데 이어 2007년에는 학교설립 100주년 행사를 거행했다.
파란만장한 115년 역사의 옥산초교도 산업화에 따른 농촌공동화를 거치면서 학생 수가 급감하는 세월의 아픔을 피하지는 못했다.
옥산초교는 지난 1969년 재학생이 500여 명에 달했으나 현재는 40명에 불과하다.
여기에다 내년 2월 6학년 졸업생이 12명인데 반해, 신학기 입학 예정자 수는 6명에 그쳐 재학생수는 더 줄어들 것으로 우려된다.
남재송(석전산업 대표) 옥산초교 동창회장은 "우리들의 옥산초교가 학생이 없어 분·폐교되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불행"이라면서 "학교에 골프 특기부 등 특활 운동부를 만들어 재학생수를 유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옥산초교 졸업생 중 유명인사로는 이지철 건풍실업회장과 이성우 대일조선회장, 이창우 전 육군소장, 이동환 전 고려대 명예교수, 이지원 옥산화섬회장, 이기덕 산내그룹회장, 경주 골굴사 적운스님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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