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 '소란'을 일으켜 '보안법 위반죄'로 투옥된 박문홍 등 경주 노동리교회 교인들은 1920년 봄까지 모두 출옥했다. 워낙 총독부 측의 단속이 심했기 때문에 3·1운동과 비슷한 운동을 벌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경주청년회'를 결성하여 민족 해방을 위한 새로운 운동 형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21년 9월 말에 경주 시가지 봉황대 맞은편 언덕에서 우연히 금관을 비롯한 대량의 화려한 보물이 발견되었다.
그냥 언덕으로 보인 것이 실은 삼국시대 신라 왕족의 무덤, 즉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판명되었다. 이후 그것은 '금관총'이라 명명되었다.
금관총 출토유물의 어마어마한 양과 화려함은 경주 사람들을 매우 흥분시켰다.
"우리에게 과거 그런 영광이 있었다니…. 그 피를 이어받은 우리에게는 다시 일어날 힘이 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조선총독부가 그 보물들을 서울 경복궁에 설치된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 간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도쿄제국대학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8-1935)나 교토제국대학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 1881-1938)·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1893-1983)와 같은 일본의 건축학자나 고고학자들을 경주로 보냈다.
그들의 목적은 조사·연구보다 금관총 출토유물을 포장하여 서울로 반출하는 것이었다.
"경주의 유물은 경주에 있어야 한다!!"
경주 사람들은 금관총 출토유물의 서울 이송을 막기 위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박문홍을 비롯한 노동리교회 교인들이 이 운동에 앞장섰다.
그들에게 금관총 출토유물은 앞으로 민족운동을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이 서울의 총독부박물관으로 가버린다는 것은 '민족적 상징'이 완전히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에게 금관총 출토유물 서울 이송은 결사 저지해야 하는 지상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커다란 장애물이 있었다. 뜻밖에도 경주 거류 일본인의 우두머리이자 경주3·1운동을 좌절시킨 장본인인 모로가 히데오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금관총 출토유물 서울 이송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모로가 측의 논리는 박문홍 측의 민족주의적 논리와 달랐다. 모로가 측은 그 보물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본인들의 지역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 총독부와 맞서고 있었다.
"원수 모로가와 손을 잡을까 말까?"
심정적으로는 박문홍 측이 모로가와 협조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나 모로가는 사이토 총독과 친분을 맺고 있었던데다가 '웅변가'였기에 총독부와 맞설 수 있는 최적의 사람이었다. 남아 있는 기록은 없으나 노동리교회 교인들 사이에 모로가와 함께 운동을 벌이는 것에 대해 치열한 논의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결국 그들은 금관총 출토유물이 경주에서 유출되는 것을 우선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모로가 측과 손을 잡는 것을 선택했다.
이 운동은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 유치운동(이하 유치운동)'이라 불리게 되었다(※여기서 사용된 '유치'라는 말은 행사나 사업을 끌어들인다는 뜻의 '誘致'가 아니라 머무르게 한다는 뜻의 '留置'이다).
한편 모로가는 '유치운동'에 많은 조선인들이 참여하는 것을 환영했다. 왜냐하면 조선인의 참여는 본인들의 불순한 동기를 가려주는 '가림막'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의 입장에서도 3·1운동 직후 조선인들의 집단적 움직임은 총독부에 큰 위협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로가라는 '방패막'이 필요했다.
'동상이몽'처럼 논리는 다르나 금관총 출토유물을 지키자는 큰 목표를 위해 경주의 조선인과 일본인들은 효과적으로 운동을 전개했다. 1921년 10월 11일에는 경주공립보통학교 마당(현 탑마트 동부점 주차장 부근)에서 금관총 출토유물 서울 이송을 반대하는 시민대회가 개최되었다. 무려 500명이나 되는 경주 주민이 모여 10명의 조선인과 일본인이 번갈아 연단에 올라가 연설하며 기세를 올렸다. 후일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고고학자 하마다 고사쿠는 뒤편에서 그 광경을 아연실색하여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경주 주민의 매서운 항의에 압도된 조선총독 부는 당초 계획을 철회하여 금관총 출토유물을 경주에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 보물들을 제대로 보관·전시하기 위해 견고한 내열성 건물 '금관고'가 경주 최부자 최준(崔浚, 1884-1970)을 비롯한 경주 주민의 기부금으로 1923년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현 경주문화원 자리)에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금관총 출토유물은 무사히 경주에서 보관·전시되었고, 이후 그 화려한 빛을 발하면서 경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사실 오늘날 '유치운동'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다. 모로가 히데오가 주역이었다는 엄연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모로가는 금관총 출토유물의 일부를 대구의 유명한 수집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에게 유출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유치운동'의 주역은 모로가만이 아니었다. 경주3·1운동을 주도한 박문홍을 비롯한 노동리교회 교인들이나 일제강점기 상하이 임시정부에 계속 독립자금을 공급한 최준이 모로가와 다른 민족주의적 논리로 '유치운동'을 지탱한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금관총 출토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것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니라 본거지 경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때의 '유치운동'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현재 특별히 돔형 건물로 보호된 금관총으로 들어가 보자. 삼국시대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의 내부 구조를 견학할 수 있으며 영상 자료나 해설판이 잘 되어 있다. 관람객들이 질문하면 안내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간 사람들이 그냥 무심히 지나쳐 갔던, 봉토가 깎인 발달형 무덤 금관총은 이제 새로운 명소로 새단장되었다.

금관총 맞은편 봉황대 남쪽에는 봉토가 깎인 금령총과 식리총이 있다. 금관총은 우연히 발견되었으나, 이 두 고분은 192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최초로 계획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그중 금령총에 대해서는 2018년부터 3년간 재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성과는 올해 11월 22일부터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개최될 특별전 "금령총"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금관총 서쪽에는 역시 봉토가 깎인 서봉총이 있다. 서봉총은 1926년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발굴조사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음 회에서는 왜 스웨덴 황태자가 머나먼 경주까지 와서 고분 발굴에 참여했는지 짚어 보고자 한다.
경북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아라키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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