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위로의 방식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역사(驛舍)에는 시화 작품들이 줄지어 있었다. '어머니의 시간'이라 명명됐다. 황혼 녘 깨친 한글은 새벽빛이었다. 부윰하게 이들의 지난 삶을 밝히는 듯했다. 정확한 맞춤법이 아니어도 행간을 읽어내는 데 무리는 없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전시된 건 의도된 것이었다.

이들의 시화에서 문학적 재능을 읽으려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신춘문예에 출품된 시 못잖은 신선함이 있다. 꾸밈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글은 대개 살아온 시간의 반추다. 비유나 상징이라는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기보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스러운, 새로운 팩트를 적시한다. 뭉클한 울림이란 대개 여기서 비롯된다.

문맹률이 제로에 가깝다며 문맹률 조사를 하지 않은 지 수십 년이다. 반대로 수십 년 지속돼온 문해교실에는 한글을 배우려는 이들이 끊임없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통계와 현실의 간극이었다. 문해교실에 발을 들이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시공간의 무궁무진한 차원이 열린다고 한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배우기 시작한 한글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는 증언들이 쏟아진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고까지 한다.

배우고 익힌다는 설렘도 있지만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있다는 동병상련의 감정이 크다고 한다. 나만 글을 몰라 수치심을 감추고 살았던 게 아니라는 유대와 위로의 심정이다.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그게 우리 탓이 아니라고, 이제는 자책하지 말자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실기(失期)를 부모에게, 동생에게 책임지라 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절과 피붙이를 동정하고 그때의 자신을 보듬는다.

그러면서 늦깎이에 깨친 현실의 기회를 귀하게 여긴다. 깜짝 선물처럼 가족들에게 편지로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엄마는 아들 모르게 야간 학교를 다녀서 이제는 편지도 쓴다. 까막눈일 때는 세상도 내 마음도 깜깜하더니 지금은 밝고 환한 세상이다. 아들도 무엇이든 열심히 배워라."(안동 마리스타학교가 발간한 문예소식지 '달맞이'에서 인용)

이태원 참사 유족들이 지난 10일 모였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끊는 심정을 이해한다면 이야말로 외람된 것이라 짐작한다. 함께 모이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때가 있다. 엄연한 위로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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