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의 '코로나 끝나면 가고 싶은 그 곳'] 포로 로마노

대문호 괴테가 사랑한 곳…발 닿는 곳마다 고대 유적 숨결
늑대 젖 먹은 로물루스, 로마 건국…하수도 정비·신기술 도입 도시 번창
믿었던 사람에 살해당한 카이사르…신전의 봉분 위 지금까지도 꽃 놓여
5만5천여명 수용 가능한 콜로세움…300년간 잔혹한 검투사 경기 이어져

포로 로마노-사투르누스 신전
포로 로마노-사투르누스 신전

그때, 코로나라는 질병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때, 상큼 달콤한 레몬 젤라또를 한 손에 들고 붐비던 로마 거리를 떠돌았던 그때, 나는 트레비분수에 동전을 던졌던가. 중국 관광객들과 온 유럽인들이 쏟아져 나온 듯한 오드리 햅번의 스페인광장 계단에서, 콜로세움에서, 판테온에서 또는 코스메딘성당 광장에서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사진을 찍기 위한 나래비에 섞였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포로 로마노에서 안토니우스가 격변을 토하며 손에 쥐고 시민을 향해 흔들었다는 죽은 카이사르의 핏자국 낭자한 옷자락 이야기만 선명하다.

나는 괴테가 그러했던 것처럼 로마에서 4개월 정도 머물다가 이탈리아 곳곳을 둘러보고 다시 1년 남짓 로마에서 살고 싶었다.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로마 건국사를 들고 폐허가 된 포로 로마노를 샅샅이 둘러보며 오래 걷고 싶었다. 광주리에 담겨져 버려진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티베르 강이 휘돌아 흐르는 일곱 개의 언덕을 모두 올라보고 싶었다. 내가 현재까지 진행되는 포로 로마노 발굴사업단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의 이름을 딴 로마

로마 건국 신화는 그리스 연합군의 목마에 의해 트로이가 불길에 휩싸이던 운명의 그 밤, 영웅 아이네아스가 가까스로 탈출하면서 시작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티베르 강가에 작은 나라를 세운 아이네아스의 13대 후손이 전쟁의 신 마르스의 쌍둥이 아들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였고, 그들 또한 모름지기 영웅이라면 겪어야할 고난을 딛고 팔라티노 언덕에 나라를 세우기로 했다. 그 와중 도시의 위치 선정 다툼으로 동생 레무스가 형에게 죽는 비극이 발생했고, BC 753년 4월 21일(이탈리아 건국 기념일) 전쟁에서 이긴 형 로물루스의 이름을 딴 로마가 건국된다.

포로 로마노의 포로(Foro)는 '포럼(Forum)' 즉 '아고라'와 같은 공공장소를 뜻한다. 로물루스 왕정시대 역대 왕의 궁전과 귀족들의 거처가 있는 언덕 아래 저지대에는 당시 시민들의 생활과 종교, 상업 등 일상을 위한 시장과 관공서 역할을 하던 바실리카 등이 세워졌다. 그것이 포로 로마노의 시작이다. 늪 지대여서 땅이 물렀지만 당시 선진 에투루리아 기술이 도입되면서 하수 시설이 정비되고 돌 콘크리트가 쌓아지면서 도시는 번창해갔다.

BC 509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성립되면서 집정관을 선출하는 대표기관인 원로원이 로마 정치의 주역으로 나서게 되었다. BC 390년 갈리아족의 침략, 50년에 걸친 삼니움 전쟁, 마케도니아 전쟁, 포에니 전쟁 등을 겪으며 로마는 점점 강력한 국가의 기틀을 잡아갔고 포로 로마노는 점점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가 되었다.

BC 88년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술라의 독재관 취임과 사퇴,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시작으로 삼두정치,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가 포로 로마노 곳곳에 넘쳐난다. 이때부터 세계의 중심은 로마가 되어갔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에서 죽고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가 독재관 취임을 며칠 앞두고 그는 가장 믿었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카이사르의 유해를 화장한 터에 세운 카이사르 신전, 늘 꽃이 놓여진다.
카이사르의 유해를 화장한 터에 세운 카이사르 신전, 늘 꽃이 놓여진다.

◆'브루투스 너마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친구 아그리파와 함께 안토니우스를 물리친 뒤 황제로 추대되어 카이사르의 유해를 화장한 터에 신전을 세웠고, 그 폐허가 된 신전의 봉분 위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꽃을 바치고 있다. 원로원 앞 광장 개선문 정면 왼쪽에는 시민들이 연설을 하던 로스트라가 있다. 키케로와 안토니우스 등이 이곳에서 연설을 했다.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곳이며 '브루투스 너마저'란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티투스황제의 개선문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AC 81년 예루살렘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웠다. 아치 안쪽에 로마군이 예루살렘 신전을 약탈하는 장면을 부조로 묘사해 놓았다. 막센티우스 또는 콘스탄티누스의 이름으로 불리는 바실리카는 306년에 지어진 것으로, 3개의 거대한 아치형 천장만이 남아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당시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포로 로마노는 이후 더 번창해 불의 여신을 위한 베스타 신전과 로물루스 신전,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에밀리아 바실리카, 원로원 쿠리아,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 포카스의 기둥,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 신전, 바실리카 율리아,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 등이 로마의 최전성기 오현제 시대 이후까지 계속 세워졌다.

395년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고 서로마제국이 수명을 다한 것은 476년이다. 그 사이 서고트족, 훈족, 반달족 등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 이미 도시는 초토화되어 있었다. 로물루스가 티베르 강가에 나라를 세운 지 1,000년 만에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무너졌는데 공교롭게도 마지막 황제의 이름 또한 로물루스였다.

티투스 황제 때 완공된 콜로세움.이 경기장에서 맹수나 검투사의 경기가 개최되었고, 황제부터 노예까지 모든 로마 시민들이 함께 관람을 할 수 있었다.
티투스 황제 때 완공된 콜로세움.이 경기장에서 맹수나 검투사의 경기가 개최되었고, 황제부터 노예까지 모든 로마 시민들이 함께 관람을 할 수 있었다.

◆티투스 황제 때 완공된 콜로세움

그 이후 화재와 대지진이 일어나 건축물이 파괴되고 권력자들의 저택이나 신전을 짓기 위해 자재를 뜯어가는 곳으로 전락하다가 1084년 노르만족, 1527년 스페인 군대로부터의 약탈로 마침내 계곡은 15m 두께의 건축파편, 흙, 재 등으로 덮이게 되었다. 그때부터 포로 로마노는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져 갔고, 중세에는 캄포 바치노(소의 들판), 몬테 카프리노(염소의 구릉)로 불리기도 했다.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포로 로마노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은 이탈리아 정부에 의한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현재 카이사르 시대 층까지 파헤쳐져 복원되어 있다. 그래서 특이하게 폐허가 된 도시의 옛 흔적을 보길 즐기는 나 같은 사람이나 좋아하는 곳이지 단순히 관광을 즐기러 온 이에게는 아주 지루한 곳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화려했을 아우구스투스황제의 개선문은 거의 흔적도 없고,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에 입성하며 퍼레이드를 벌였을 때의 광경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 이들을 위해 72년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해, 80년 티투스 황제 때 완공된 콜로세움 관람을 추천한다. 포로 로마노에서 걸어서 동일한 티켓으로 바로 입장이 가능하니 일거양득이다. 총 5만 5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고 80여 개의 아치문을 통해 관중들이 입장하는 데 30분, 퇴장하는 데 불과 15분밖에 걸리지 않고, 고대 건축물로 개폐형 지붕 같은 놀라운 시설을 갖춘 콜로세움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1층부터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구조의 이 경기장에서 맹수나 검투사의 경기가 개최되었고, 황제부터 노예까지 모든 로마 시민들이 함께 관람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신분에 따라 자리가 달랐으며, 1층은 귀빈석, 2층은 일반석, 3층은 입석으로 이루어졌다.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검투사들의 잔혹한 경기가 계속되다가, 450년 호노리우스황제가 경기를 중지시키면서 그 효용성은 끝이 난다.

'친구들이여, 이제부터 소식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 바란다. 여행 중에는 무엇이든 가능한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움켜쥐려고 한다.' 괴테가 로마에 도착해 보낸 편지다. 진정 공감한다.

박미영 시인
박미영 시인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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