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고도 경주의 근대산책] 일본이 홍살문·남문을 철거한 까닭은?

지금까지 초대 경주역이 입지한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출발하여 해방 직후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된 호우총, 1916년 봄까지 성덕대왕신종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1919년에는 경주 3·1운동이 벌어진 봉황대 주변, 최초로 대량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 매장품이 발견된 금관총, 그리고 일제강점기 '문화통치'하에 스웨덴 황태자까지 동원하여 '정치 쇼'가 벌어진 서봉총을 다녀왔다.

이제 홍살문을 지나 경주읍성을 향하고자 한다. 금관총 발견의 계기가 된 도로공사로 생긴 신작로(新作路)는 일제강점기 '혼마치도리'(本町通り)라 불렸으며 초대 경주역과 경주읍성을 연결했다. 지금의 봉황로이다. 당시 길가에는 중심상가가 형성되었다. 현재 '혼마치도리' 사진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1934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생활상태조사 경주군' 부록에 그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진이 실려 있다.

옛 혼마치도리(현 봉황로)
옛 혼마치도리(현 봉황로)

지금보다 크게 보이는 비포장 길에 하얀 전통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 길가에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전봇대도 보여 전통과 근대가 뒤섞여 있는 과도기적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풍경은 '혼마치도리'의 어디서 촬영된 것일까? 실마리는 상점 간판에서 찾을 수 있다. 오른쪽 길가에 '춘일여관'(春日旅館)이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그 여관은 가스가 후사이치(春日房一)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가스가료칸'이다. 왼쪽 길가에는 '축성본점(築城本店)'이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그것 역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잡화점이었다.

1931년에 제작된 '경주읍내시가약지도'(慶州邑內市街畧地圖)에서 그 여관과 상점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

현재 봉황로.
"경주읍내시가약지도"에 표기된 가스가료칸과 축성본점.

봉황대와 금관총 바로 북쪽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금관총 부근에서 북쪽을 향하여 찍은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비슷한 지점에서 촬영한 사진과 비교해 보자.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신라 토우
현재 봉황로.

아마도 지금 오른쪽에 보이는 정자처럼 생긴 휴게공간 부근이 당시 '가스가료칸'이 있었던 자리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의 길 폭이 조금 더 크게 보이지만 현재 봉황로는 차도와 보행로가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다소 좁게 보일 뿐, 길 크기에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진의 큰 차이는 홍살문의 유무이다. 현재 사진에서 현수막에 윗부분이 다소 가려져 있지만 도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홍살문은 '경주시 봉황로 문화의 거리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2010년경 복원된 것이다. 한편 옛 사진에는 원래 있어야 하는 홍살문의 흔적조차 찾아낼 수 없다. 지난번에 소개한 한일병합 직전에 촬영된 사진에는 홍살문이 뚜렷하게 찍혀 있다. 그래서 이 옛 사진의 풍경은 홍살문이 철거된 후의 길가 모습이다.

홍살문이 언제 철거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아마 1910년 한일병합을 전후하여 신작로가 개통되어 경주읍성 남문이 철거될 때 홍살문도 같이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은 왜 홍살문이나 남문을 철거했을까? 남문에 관해서는 1912년 11월 데라우치 조선총독이 타는 승용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철거했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일본인이 조선인들에게 조선왕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구조물을 되도록 없애려고 한 것은 분명하다. 홍살문 터 부근에는 1920년대 전봇대가 세워졌다. 홍살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조선인의 눈에 그런 일본인의 소행은 어떻게 비쳐졌을까?

복원된 홍살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묘한 모습의 큰 석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토우들의 합창'

표지석에는 '토우들의 합창'이라 새겨져 있다. 이것은 1926년 여기서 남쪽 1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신라의 토우, 즉 흙으로 만든 인형 모습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신라 토우

진품은 10cm도 안 될 정도의 크기인데 그것을 확대하여 돌로 만든 것이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주는 석조물이다. 신라 토우는 남녀가 성교하는 모습이나 생식기가 비대하게 강조된 모습이 고대 신라인의 자유분방한 기상을 보여주는 유물로 주목받고 있다.

1926년 5월 황남대총 북동쪽 구역에서는 경주역 확장을 위해 필요한 흙을 채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개, 말, 사슴, 돼지, 뱀, 개구리 같은 동물이나 인물을 빚은 토우가 대량으로 출토된 것이다. 그중에는 노골적인 성적 표현으로 만들어진 인형들이 많아 일본인 고고학자들은 "옛 신라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것을 만들었는가"라고 무척 놀랐다고 한다. 당시는 엄격한 군국시대였으며 신라 토우는 '음란물'로 간주되어 일본인들이 공개를 망설였다고 한다.

하여간 이런 유물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흙 채굴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경주역 확장을 위해 필요한 흙을 어디서 가지고 올까 고민한 끝에 일본인들은 지난 회에 설명했듯이 서봉총을 발굴하면서 그 봉토를 경주역으로 옮겼다. 이 석조물은 봉황로를 고도답게 장식하기 위해서 설치된 것이지만 신라 토우와 우리가 다녀온 경주역(서라벌문화회관), 그리고 서봉총 사이에 숨어 있는 내밀한 관계를 상기시켜준다.

다음 회는 '혼마치도리'를 더 올라가 경주읍성 남문 터와 경주제1교회를 탐방해보고자 한다.

경북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아라키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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