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주목

나무껍질 붉은색이라 붙여진 이름…백두대간 언저리 산들이 주목 터전
회양목보다 더딘 성장 썩음도 느려…잡귀 쫓는 '벽사' 의미 최고급 관재

덕유산 설천봉의 슬로프 근처에 있는 주목. 마른 줄기와 살아 있는 가지가 어울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수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덕유산 설천봉의 슬로프 근처에 있는 주목. 마른 줄기와 살아 있는 가지가 어울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수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가을 구름이 만 리에 뻗었으니 생선 비늘처럼 하얗고

秋雲萬里魚鱗白(추운만리어린백)

천 년 묵은 고목은 사슴뿔처럼 높게 치솟았네

枯木千年鹿角高(고목천년록각고)

조선시대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진 방랑시인 김병연이 금강산 구경하면서 시를 잘 짓기로 소문난 승려를 찾아가 시 짓기 내기를 청했다. 승려가 먼저 한 구절을 읊으면 김삿갓이 대구를 지은 시 '금강산입석봉하암자시승공음'(金剛山立石峰下庵子詩僧共吟)의 한 구절이다. 김삿갓이 본 '천 년 묵은 고목'의 이름을 콕 찍어 말하지 않았으나 '사슴뿔처럼' 치솟은 형상으로 봐서 금강산의 주목이 아닐까 추측된다.

흔히 주목을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으로 표현한다. 이를 증명하듯 강원도 정선군 두위봉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세 그루의 주목은 1천 년 넘는 유구한 세월의 온갖 풍상 이겨내고 지금도 사시사철 푸른 기품과 거대한 몸집으로 '천년지기'의 품위를 지키고 있다.

상록침엽수인 주목(朱木)은 나무껍질과 목재 고갱이가 붉은 색을 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강원도 정선군 두위봉에 있는 천연기념물 주목. 정선군 제공
강원도 정선군 두위봉에 있는 천연기념물 주목. 정선군 제공

◆두위봉에 우뚝 선 1천400년 주목

산림청에서 발간한 「한국수목지」에 주목의 자생지로 설악산, 오대산, 계방산, 태백산, 발왕산,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 한라산 등을 꼽았고 점봉산, 청옥산, 치악산, 함백산, 일월산, 가리왕산, 금대봉, 울릉도(회솔나무) 등에도 작은 군락이나 몇 그루 정도 남아 있는 것으로 나온다. 한라산과 울릉도를 제외하면 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과 그 언저리에 위치한 산이 주목의 터전이다.

소백산 군락과 강원도 정선군 두위봉의 주목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 받고 있고, 덕유산의 군총은 전라북도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소백산 주목군락지 전경. 소백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제공
소백산 주목군락지 전경. 소백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제공

국내 군락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곳은 소백산이다. 14만여㎡의 면적에 200~500년 된 주목 1천여 그루가 생육한다.

태백산 군락지에는 오래된 나무가 많다. 장군봉을 중심으로 수십 년생부터 900여 년 묵은 아름드리 주목이 곳곳에 무리지어 자란다. 태백시 혈동 군락지는 1992년에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됐다.

더욱이 태백산과 멀지 않는 정선군 사북읍 두위봉 중턱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주목 세 그루가 우뚝 서있다. 그 중에 한 그루는 수령이 1천400여 년으로 높이가 14m, 둘레가 4.6m로 세 아름이나 되는 국내 대표적 노거수다. 다른 두 그루도 1천 년이 훌쩍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나무가 뿌리 내린 시기를 따져보면 대략 7세기쯤이므로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인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과 같은 시대다.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겪는 동안 모진 고난을 이겨내고 십 수 세기 동안 백두대간의 터줏대감으로 꿋꿋이 자리를 지켜왔다.

◆조선 선비도 감상한 덕유산 주목

"삼계 위쪽으로 적목(赤木)이 많아, 갈수록 숲을 이루다가 봉우리 아래에서 한계에 이르렀다. 이 나무는 몸체가 붉고 잎은 전나무와 같은데 큰 것은 몇 아름이다. 가지와 줄기는 이상하게 굽어 평소에 보지 못하던 것들이다."

(三溪以上多赤木 轉轉林立 至峯底而極焉 是木赤身檜葉 大可數圍 枝幹奇屈 平日所未見也) <『갈천선생문집』 권3>

조선시대 선비 갈천(葛川) 임훈(林薰)이 쓴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峯記)에 적목(赤木)을 설명한 부분이다. 향적봉 아래 적목은 바로 주목을 가리킨다.

학창시절 친구와 함께 갔던 전라북도 무주군 덕유산 향적봉에는 곳곳에 아름드리 주목과 고사목들이 즐비했다. 기억을 되살려 주목을 다시 만나기 위해 케이블카에 몸을 싣고 설천봉으로 향했다. 8, 9부 능선 위를 지날 때 발아래 빼곡한 나목 사이사이로 짙푸른 주목이 보였다. 국립공원의 탐방로를 따라 정상인 향적봉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난해 가을 들어 첫 눈이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탐방로가 제법 미끄러웠다.

향적봉에 올라 설천봉을 바라보니 정상 주변에는 수풀이 사라지고 각종 건축물로 봉우리가 휑뎅그렁하다. 음지를 좋아하는 주목이 많이 자라는 추운 북쪽 경사면은 초봄까지 잔설이 남는다. 이런 곳에 1980년대 후반에 스키장을 건설하면서 산과 나무가 많이 훼손됐다.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최를 빌미로 스키장과 편의시설을 늘리는 바람에 주목뿐만 아니라 구상나무, 가문비나무 등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더욱더 파괴됐다. 무주리조트는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 때 허가 됐다.

강원도 함백산에 있는 아름드리 주목. 우종식 씨 제공
강원도 함백산에 있는 아름드리 주목. 우종식 씨 제공

◆느림의 미학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나무

주목 줄기는 1년에 1㎜정도 굵는다고 하니 성장이 이렇게 느려터진 나무가 어디 또 있을까 싶다. 성목이 되기까지 키가 1년에 겨우 10㎝정도 자란다. 100년 동안 커도 키는 10m 남짓이다. 성장이 더디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무가 회양목인데 주목의 자람은 이보다 더 느리다. 성장의 세월이 길다보니 수명도 길수밖에 없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의 예찬에는 썩는 데도 천 년이 걸린다는 뜻이 담겼다.

성장이 느린 만큼 나무의 재질이 단단하고 보존성이 뛰어난 데다 뒤틀림 없이 곧다. 조직이 치밀해 장구한 세월에도 부패하지 않고 보존성이 좋아 목재 중에서 으뜸으로 친다. 게다가 나뭇결이 곱고 부드러워 쓰임이 많다.

목재가 붉기 때문에 사악한 잡귀를 쫓는 '벽사'의 의미로 여겨 최고급 관재(棺材)로도 사용됐다. 평양 부근 오야리 낙랑고분, 경주 황룡대총의 나무 관과 공주 무령왕릉의 왕비 시신 머리를 괴는 나무도 주목으로 밝혀졌다. 영화를 누리던 사람은 간 데 없지만 주목은 '죽어 천 년'을 직접 증명한다.

유럽에서는 늘 푸른 잎을 가진 주목이 저승으로 떠나는 망자를 마녀의 심술로부터 지켜준다고 믿었다. 사람이 영면에 들면 장례 때 주목 화관을 썼고 수의(壽衣)에 주목 가지를 넣었다.

소백산 희방사 앞뜰에 있는 주목은 줄기에 붉은 색이 뚜렷하다.
소백산 희방사 앞뜰에 있는 주목은 줄기에 붉은 색이 뚜렷하다.

◆영국 로빈 후드 전설

"이 화살이 떨어진 곳에 나를 묻어 달라"

영국 '의적'인 로빈 후드가 폭정을 일삼던 존 왕의 부하들과 싸우다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자 동료 리틀 존에게 이렇게 부탁하고 마지막 혼신의 힘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그가 숨어 지내던 수녀원 근처 숲에 있는 주목의 밑동을 맞혔다. 리틀 존은 로빈 후드의 유언에 따라 주목 옆에 그를 매장했다.

명궁 '로빈 후드' 설화에 주목이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서양에서는 16세기 중반까지 주목으로 만든 장궁(長弓)이 인기 좋았기 때문이다. 주목은 저항력이 강하고 매우 단단할 뿐만 아니라 탄력성도 강하다. 1m 길이의 장궁은 화살을 300m 정도 거뜬하게 날리는 위력이 있다.

화약을 이용한 총 같은 무기가 본격 도입되기 전까지 활은 아주 유용한 공격 무기였기 때문에 활의 소재인 주목은 전쟁 물자로 취급됐다. 당시 활 수요가 어찌나 많았던지 영국의 주목 숲이 사라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주목 열매. 새빨간 가종피 속의 씨앗이 보인다.
주목 열매. 새빨간 가종피 속의 씨앗이 보인다.

◆빨간 열매 함부로 먹지마세요

가을에 마치 새끼손톱 크기의 주목 열매는 앵두보다 더 붉은 선홍색으로 익는다. 가운데 구멍이 뻥 뚫려 열매 속의 씨를 살짝 보여주며 새들을 유혹한다. 새들에게 먹혀서 자손을 멀리 퍼뜨리려는 전략이다. 물기가 많고 맛있어 보이지만 종자에 독성이 있어 사람들은 함부로 먹으면 설사나 복통에 시달릴 수도 있다. 독성의 정체가 택세인(taxane)으로 밝혀졌는데 고대 로마에서는 주목의 씨를 빻아 화살촉에 발랐다고 한다.

독성은 곧 약성과 통했던가. 주목의 독성은 암세포의 무한 증식을 억제하는 항암제로도 이용된다. 유방암이나 기타 암들을 치료하는 것이 오래전부터 약학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다. 주목 껍질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든 탁솔(taxol)은 한때 '기적의 항암제'라고 불렸다. 유방암, 폐암 등의 치료에 사용된다. 그런데 1g의 탁솔을 얻으려면 주목 3천 그루가 필요하다.

울릉도 나리분지의 회솔나무.
울릉도 나리분지의 회솔나무.

◆주목의 종류

곧게 자란 주목에 비하여 높은 산에서 관목처럼 원줄기가 여러 개로 갈라져 땅바닥에 기다시피 자라는 눈주목이 있다. 억센 바람이 부는 산꼭대기에서 오랜 세월 환경에 적응하다보니 아예 우리나라의 설악눈주목이라는 종으로 거듭났다. 높은 산에서 자라는 눈향나무, 눈잣나무와 동병상련의 처지다. 울릉도에는 주목과 비슷한 회솔나무가 있다. 잎의 너비가 주목보다 더 넓다.

높은 산에서 누워 자라는 눈주목.
높은 산에서 누워 자라는 눈주목.

아파트 단지나 공원에서 주목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성장이 더딘 주목이 흔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조경수로 키우는 주목은 꺾꽂이나 휘묻이 같은 영양번식으로 키운다. 시중에서 흔히 보는 주목은 대부분 일본에서 개량된 나무를 조경수로 보급한 것이다.

서양주목은 유럽과 북미가 원산지인데 수형을 다듬어 정원을 꾸미는데 쓰인다.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은 삼각형, 원뿔 등 다양한 형상의 토피어리(topiary·가지치기 기법)를 연출함으로써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나무칼럼니스트 chunghaman@korea.com

◆주목(별도 미니 박스)

학명: 탁수스 쿠스피다타 지볼트 앤 추카리니(Taxus cuspidata Sieb. et Zucc.)

속명 탁수스(Taxus)는 활을 뜻하는 라틴어 타오스(taos)에서 유래, 종소명 쿠스피다타(cuspidata)는 '뾰족하게 하다'는 의미.

영어명: Japanese Yew

한자명: 주목(朱木), 경목(慶木), 적백송(赤柏松), 적목(赤木), 자삼(紫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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