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장정옥 소설가의 스승 고(故) 박완서 소설가

내 소설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분…"선생님 사랑합니다"

제40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제40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스무살의 축제' 당선 후 출판기념회 때 박완서(오른쪽) 선생님과 함께한 기념사진. 장정옥 씨 제공

열일곱 살 그때에 원 없이 책을 읽을 수 있게 책방주인이 되고 싶었다. 뒤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일 것 같은 나날마다 동네 책방을 기웃거렸다. 서점 블라인드 북으로 『나목』이 전시되어 있었고, 서점에 들어가면 언제든 그 책을 열어볼 수 있었다. 내가 책을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책방주인은 나를 내쫓지 않았다.

아직 문학이 뭔지 모를 때였고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지 짐작도 못할 때였다. 책방에 들어갈 때마다 나목을 한 페이지씩 읽었다. 미군 부대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 사람이 바로 화가 박수근 화백이었던 걸 아주 나중에 알았다.

『나목』으로 인해 선생님을 마음에 담은 그날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정말 우연처럼 단편소설로 등단하고 말았다. 내 나이 40살이 되던 날이었고, 그다지 큰 염원도 없이 시작된 놀라운 사건이었다. 어린이날 방영된 '버려진 아이'가 내게 그 소설을 쓰게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버림과 버려짐에 대한 내 문학적 고찰의 출발이, 소설이 무엇인가를 실물로 보여주셨던 『나목』의 작가를 실제로 만난 것은 등단하고 십 년이 더 지난 후였다.

생애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응모했다. 반드시 거기여야 했던 건 휘청거리던 내 십대의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나목』의 작가 박완서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었다. 박완서 선생님이 거기 초대작가였다. 내가 40회 당선자였으니 얼마나 새카만 후배인가. 시상식에서 조금은 쇠약해 보이는 선생님께 귓속말로 물었다.

"팔짱 껴도 돼요?" 선생님이 그 햇살 같은 웃음 함빡 담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분이 어찌 알겠는가. 너무 가난해서 진학도 무엇도 꿈꿀 수 없었던 내 막막한 십대의 빛이 되어주셨던 분이 당신이었던 것을. 그날 그분의 팔짱을 끼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절실히 닿고자 했던 곳이 어디였는지.

여성동아 문우회에서 펴낸
여성동아 문우회에서 펴낸 '나의 박완서, 우리의 박완서' 책자. 장정옥 씨 제공

여성문우회 회원들이 내 첫 번째 책 『스무살의 축제』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셨다. 그 출판기념회에 박완서 선생님도 오셨다. 선생님과 팔짱 낀 채로 사진도 찍고, 술도 마시고, 맘껏 웃으며 보낸 1박 2일의 일정으로 내 맘속 깊은 방에 선생님을 모셨다. 그날부터 선생님은 내 소설의 길잡이가 되어 힘들 때마다 소설책으로 길을 일러주셨다.

선생님처럼 세상을 아프게 꼬집고 쓰다듬으며 따뜻한 인간애로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제대로 된 책을 들고 가서 '선생님, 저의 두 번째 책입니다' 하며 자랑스럽게 드리려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설이 다가와 주지 않았다.

너무 늦으면 영영 선생님을 못 뵐 수도 있다는 선배님들의 충고에 마음이 바뀌어 아치울마을로 가려 준비하던 중에, 선생님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응급실에 들어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며칠 후 선생님의 부고를 받았다. 살아서 만나야 할 분을 그렇게 영면에 드신 후에야 만난 내가 너무 미웠다.

선생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던 두 번째 책은 그러고도 3년이나 지나서 세상에 나왔다. 운이 좋아서 첫 책으로 상을 받은 게 아니고, 제대로 된 실력으로 받았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영영 못하고 말았다.

선생님을 그토록 존경하면서도 '사랑합니다' 하는 마음의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내가 너무 못나서 마음이 아프다. 그분은 떠나셨지만 가까이에서 내가 존경하는 그분의 따뜻한 손도 잡아보았고, 온화한 웃음을 받으며 팔짱을 끼고 사진도 찍었다. 중요한 것은 가슴에 담아둔 사람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랑해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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