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일이 통역이다 보니 말이 좀 많은 편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웃음이 난다. 물론 괜찮다. 한참 생각을 정리해 질문했는데 간단히 대답해버리면 더 괴롭고 식은땀이 난다. 술술 얘기를 풀어내는 파리 교민 류세현(39) 씨는 프랑스 양궁 대표팀 통역사다. 프랑스 대표팀이 자국에서 열리는 2024 파리 올림픽에 나서는데 웬 통역인가 싶다.
류 씨는 2022년부터 프랑스 양궁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한국인 오선택 총감독의 통역을 맡고 있다. 오 감독은 2000 시드니, 2012 런던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을 지휘한 전설. LH 양궁단을 이끌다 정년 퇴임한 오 감독은 안방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양궁 메달을 꿈꾸는 프랑스와 연이 닿았다.
류 씨는 유학 관련 업무와 통·번역 프리랜서로 활동하다 프랑스 양궁협회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는 "2013년 프랑스에 온 뒤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파리7대학에서 아시아, 그 중에서도 중국학을 공부했다"며 "석사를 마치고 박사 1년 차였는데 휴학한 뒤 이 일을 맡았다. 재미와 명예 모두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했는데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류 씨의 삶은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서울 출신인데 인도와 네팔, 필리핀, 아이티 등에 머물렀다. 일본 ANA항공(전일본공수)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고, 교환 학생으로 대만 생활을 하기도 한 덕에 일본어와 중국어도 할 수 있다.
프랑스에 오기 직전엔 카메룬에서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과 한국 대사관 일을 1년 간 하기도 했다. 카메룬에서 일상 생활을 하기 위해 프랑스어를 익히다 보니 재미를 붙여 더 공부를 하려고 프랑스로 건너왔다. 그리곤 프랑스 생활이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었다.
류 씨는 "오지나 상대적으로 낙후된 곳에 많이 있다 보니 프랑스에 와서도 힘든 걸 잘 모르겠다. 다양한 문화 생활을 접할 수 있고, 생활하기도 편하다"며 "낯선 곳에도 잘 적응한다. 해병 출신이라 정신력, 생활력이 좋다"고 웃어 넘겼다.
말을 잘 한다 해서 전문 통역이 쉬워지는 건 아니다. 류 씨 역시 양궁에 대해 전혀 몰랐던 터라 처음엔 많이 헤맸단다. 언어와 문화가 낯선 오 감독이 선수, 코칭스태프와 소통하는 데 가교 역할을 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그는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적 지도'를 설명하는 게 힘들었다. 이를 테면 우리 선수에게 하듯 '힘을 빼고 쏘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시는데 선수들에게 그걸 정확히 이해시키는 게 어려웠다"며 "남자 선수들이 쓰는 활은 일반인들이 당기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그런데도 힘을 빼라니 이 사람들로선 이해가 잘 안 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진심은 통하는 법. 여기다 시간이란 약이 더해지면서 그런 문제들이 풀려나갔다. 그리고 이번 올림픽에서 프랑스 양궁 대표팀은 남자 단체전 은메달과 여자 개인전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여자 부문 메달은 예상하지 못했던 성과. 프랑스 양궁협회는 이번 성적에 고무됐다. 2028 LA 올림픽 때까지 대표팀을 오 감독에게 맡길 가능성도 생겼다.
류 씨는 "선수들이 메달을 땄을 때 정말 기쁘고 감동적이었다. 여자 선수가 동메달을 따고 펑펑 우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맛에 이 일을 하는구나' 싶었다. 나도 이 팀에 기여를 한다는 자부심도 느꼈다"며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있다. 나도 2028년까지 같이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2년 전 한국인과 결혼한 류 씨는 오는 12월 아빠가 된단다. 그동안 아내에게 잘 해주지 못해 미안한 게 많다고 했다. 그는 "이번 올림픽이 끝나면 두 달 정도 여유가 생긴다. 병원도 함께 가고 열심히 옆에서 챙겨야 할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파리에서 채정민 기자 cwolf@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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