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92>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그린 80년 전 아회도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미술사 연구자

손재형(1903-1981),
손재형(1903-1981), '승설암도(勝雪盦圖)', 1945년(43세), 종이에 수묵, 40.9×60.6㎝, 개인 소장

기와를 가지런히 얹은 격조 있는 담장과 마른 나뭇가지들이 보인다. 담을 따라 나지막하게 조성한 화단의 꽃나무들이 조용한 계절이다. 모서리엔 큼지막한 괴석이 받침대 위에 놓였고, 한 가운데는 키 큰 나무 두 그루가 자리 잡았다. 사랑채에서 내다본 사랑마당일 것이다. 헛담 뒤로 보이는 기와집 팔작지붕 위에 이렇게 써 놓았다.

을유년(1945년) 청명(淸明)날 승설암(勝雪盦) 한가로운 뜰에 와서 놀았다. 상허(尙虛) 인형(仁兄)이 나에게 그림으로 그리라 하여 이 그림으로 한때의 성대한 모임을 기록한다. 함께 모인 사람은 토선(土禪), 인곡(仁谷), 모암(慕菴), 심원(心園), 수화(樹話), 소전(素荃)이다.

마지막에 '소전'이라고 멋지게 쓴 옆에 '손씨재형(孫氏在馨)' 인장이 있어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이 그림을 그리고 제화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일곱 분이 청명 절기를 맞아 함께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80년 전 이맘때다. 올해는 지난 금요일이 청명이었다.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 기억하자고 한 사람은 소설가 상허 이태준이다. 토선은 치과의사이자 도자기를 중심으로 명품을 모았던 수집가 함석태이고, 인곡은 승설암 주인 배정국이다. 모암은 미상이고, 심원은 한국화가 조중현 수화는 그 유명한 서양화가 김환기다.

승설암은 인천에서 사업을 하던 배정국이 1936년 즈음 서울로 이사하며 자리 잡은 성북동 그의 집이다. 정원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승설암은 만해 한용운의 집 심우장, 근원 김용준의 집 노시산방, 상허 이태준의 집 수연산방과 이웃이었다.

백양당(白楊堂)이라는 상호로 출판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사업을 한 배정국은 예술 애호가였다. 모였던 분들은 함께 답사도 다니고 수시로 술상, 찻상을 함께하며 고미술품을 감상했다. '승설암'이라는 당호는 이 아회의 참석자들이 경모한 추사 김정희에서 나왔다. '승설'은 차 이름이다. 1810년 25세의 김정희가 북경에서 완원을 만났을 때 대접받은 차였다. 차가운 눈 속에서 움터 나온 찻잎으로 만든다고 한다. 김정희는 이 차 맛을 잊지 못했고 '승설도인'이라는 아호도 지었다.

'뚜껑 암(盦)'자를 승설암에 쓴 것도 김정희 때문이다. 북경의 옹방강이 김정희에게 보낸 글씨가 '시암(詩盦)'이다. 그래서 우봉 조희룡의 화구암(畵鷗盦), 초의 선사의 일지암(一枝盦) 등 김정희와 가까운 사람들이 '암(盦)'자를 당호에 썼다.

청명 다음 절기인 곡우 전후에 햇차가 나온다. 청명 즈음이면 차인들은 햇차를 손꼽아 고대한다. 올해는 차맛이 어떨까? 작황은 예년만 할까? 올 일 년 차 양식은 어떻게 장만할까? 등등. 승설암에서 김정희를 기리며 이런 차담을 나누셨을 것 같다.

미술사 연구자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국민의힘은 6·3 지방선거 경북도지사 후보 선출을 위해 '한국시리즈 방식'의 비현역 예비경선을 도입하며, 이철우 도지사와의 본경선 진출 후보...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미 연방대법원의 상호관세 무효 판결에 따라 무역법 301조 조사를 개시하면서 한국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가 커...
대구경북의 행정통합이 12일 사실상 무산되면서 지역사회에 허탈감이 퍼지고 있으며, 정치권의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구...
한국 야구대표팀이 2026 월드베이스볼클래식 2라운드 진출 후 대만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점수 조작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를 소재로 한 떡볶이..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