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객들이 제 작품을 보고 여성 작가냐고 물어올 때 왠지 모를 쾌감이 있어요. 그들을 잘 이해하고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인정처럼 느껴져서 그런 것 아닐까요?"
실과 비즈, 아기자기한 오브제와 레이스 패턴 등을 사용하니 당연히 여성 작가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보기 좋게 깨졌다. 갤러리 전(대구 수성구 달구벌대로 2811)에서 선보이고 있는 이성재 초대전은 그러한 반전에서 오는 신선함과 감동을 함께 안겨주는 전시다.
작가가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지난해 화랑미술제 신진작가 특별전에서다. 대상을 수상한 그의 작품 '깨진 물(Broken water)'은 한 땀 한 땀 섬세하게 매듭짓고 꼬아진 나일론 실이 천장에서부터 흘러내리듯 반구와 원뿔형을 이루고, 바닥에는 비즈와 오브제들이 채워진 작품이었다. 높이 3.3m의 대형 작품은 신비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특히 많은 여성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작가는 "작품 제목은 양수가 터졌다(Water Break)는 표현"이라며 "임산부의 배 같은 둥근 반구에서 아름다운 형태가 쏟아져 내려오는 것을 형상화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작가는 아내와 어머니 등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 여성들의 얘기와 모성애, 가족애 등을 작품으로 펼쳐보인다. 너무 당연하게 여긴 존재들이 준, 당연하게 여긴 사랑을 작품을 통해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신작 '마른 땀'은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의 모습을 담았다.
"꿈 많고 예뻤던 여자가 피, 땀, 눈물이 범벅돼 애를 낳는 모습을 봤어요. 너무 대단한 역할을 하는데도 이 땀이 말라붙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아 안타까웠죠. 열심히 손으로 뜨개질해서 치맛자락 아래 떨어지는 땀과 핏방울 등을 표현했어요."
그래서인지 전시장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여성들이 많은 편이다. 실의 색 그라데이션이 눈에 띄는 작품 '치맛바람'은 가족을 위해 생기를 다 써버리고 점차 새하얗게 사라져가는 듯한 엄마의 모습을 담았다. 울렁이는 모양으로 매듭 지은 끝단은 자식의 모든 것을 안아주는 바다 물결 같기도, 우리네 어머니들의 꼬불꼬불 파마머리 같기도 하다.
'딸 같은 아들'인 그가 어깨 수술한 어머니의 머리를 감겨드린 경험이 소재가 된 작품도 인상 깊다. 둥글게 몸을 만 듯한 모양새 아래로 검게 흘러내리는 듯한 실들을 늘어뜨렸다.
그는 "괜찮다고 하는 엄마와 실랑이하다, 엎드리게 해서 머리를 감겨드리니 전에 염색했던 물이 빠지면서 시커먼 물이 우두두 떨어졌다. 그게 마치 속상해서 마음이 새까맣게 탄 것들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며 "항상 곁에 당연히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에게 마음과 다르게 말이 툭툭 내뱉어지는 경우가 많다. 작품을 통해 내 속의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예에 가까운 '입체 드로잉'을 하는 그는 원래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학교(CalArts)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추상화된 애니메이션 작업을 해왔지만,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길을 찾았다.
그의 내면에는 항상 입체 작품에 대한 갈증이 있었지만 작업실이 없어 재료 선택과 구현이 쉽지 않았고, 고민 끝에 눈에 들어온 재료가 바로 실이었다. 그는 "내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접근 가능한 재료였다"며 "막상 해보니 애니메이션이 가진 움직임, 내가 좋아하는 펜촉으로 그려낸 드로잉적 요소, 애니메이션 작업에서 아쉬웠던 물질감까지 함축한 것 같아서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흔히 예술계가 이끄는 거대 담론이나 미술사적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진솔하고 담백하게 담아내고, 그 서사는 곧 작가의 삶이자 우리의 삶이기에 공감과 위로를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노동에 가까운 작업 과정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적도 많았지만 결국 지금의 재료와 기법, 섬세함을 갖게 된 지금의 자신을 운명이자 팔자로 여기고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갈 수 있는 곳, 쓸 수 있는 재료, 내가 겪었던 일, 내 성격 등 모든 게 결부돼서 지금의 작업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최대한 소박하고 쉽게, 진심 어린 나의 얘기를 전하고 싶어요. 제 이름을 들으면 '~하는 작가'라고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독창적인 나만의 작업 방식을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설치뿐 아니라 드로잉과 영상 작품 등 40여 점의 작품을 함께 소개한다. 특히 설치와 보관, 관리 등에 애를 먹었던 기존의 작품에서 나아가, 프레임 속에 입체 드로잉을 구현한 신작도 처음으로 선보여 눈길을 끈다. 전시는 6월 13일까지. 053-791-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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