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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훈 칼럼] 주인 노릇을 해야 주인이다

정경훈 논설주간
정경훈 논설주간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국가에서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顚覆)하는 '고전적' 쿠데타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잠시 정권을 장악할 수는 있지만 무력으로 국민을 계속해서 복종하도록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민주주의 국가는 쿠데타의 위험에서 안전해진 것일까. 영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민주주의가 확실히 종식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쿠데타가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민주주의가 훼손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쿠데타가 있다."('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새로운 신호들') 외견상 민주주의의 형태를 유지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하는 것도 쿠데타라는 것이다.

이런 쿠데타는 '비(非)무력'에다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고전적' 쿠데타는 단기간에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지만 '비무력' 쿠데타는 성공 여부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채로 장기간 지속된다. 그 결과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음에도 국민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 교활하고 더 위험하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쿠데타를 쿠데타로 인식하지 못하니 거기에 대항한 국민의 결집·봉기(蜂起)를 촉발할 방아쇠도 잘 보이지 않는다. 미국 정치학자 낸시 버메오는 이렇게 말한다. "산산조각 나지 않고 서서히 무너지는 민주주의는 행동을 개시하게 하는 실질적 발화(發火) 장치가 없다."

이런 유형의 쿠데타는 페론의 아르헨티나, 차베스와 마두로의 베네수엘라, 빅토르 오르반의 헝가리 등에서 일어났거나 진행되고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절대다수 의석을 무기로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고위 공직자에 대해 31차례나 탄핵안을 발의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을 제외하면 10전 10패라는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결과가 말해 주듯 그 목적은 마음에 들지 않는 공직자의 직무 정지와 이를 통한 윤 정부 흔들기였다. 헌법 규정을 악용한 '실질적' 내란 행위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대법원의 이재명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2심 파기환송 결정 이후 쏟아 낸 '사법부 장악' 법안들은 또 어떤가. 이른바 '김어준 대법관' 법안은 철회했지만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는 재추진 여지를 남겼다. 게다가 대선 후보 등록 및 당선 때는 재판을 정지하고 무죄 선고 재판만 할 수 있도록 한 법안까지 냈다.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일반성, 모든 사람의 특수한 이해관계에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추상성이라는 법률의 속성을 철저히 무시한, 허위 사실 공표 혐의로 형량 결정만 남았을 뿐 유죄가 확정돼 전과 5범이 된 이재명을 위한 법치의 파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집단, 이런 정치인이 정권을 장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비무력 쿠데타가 확대·강화되면서 우리 민주주의는 냄비 속에서 서서히 삶기는 개구리 꼴이 될 것이라는 공포가 쓰나미처럼 덮친다.

"거리를 살펴보니 각 상점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백 년 왕국이 하루아침에 망하는 이날에 이렇게도 평안하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이상한 감정을 금할 수 없다."('조선의 최후' 김윤희·이욱·홍준화)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최린은 조선이 망한 1910년 8월 29일 서울의 거리 모습을 이렇게 기술했다. 그럴 만했을 것이다. 조선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고종이었다. 주인이 아니니 주인이 망하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

미국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이유는 국민이 독재자를 선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재자를 선택하지 말아야 하지만 쉽지 않다. 스스로 독재자라고 하는 독재자는 없다. 국민의 선택을 받으려는 잠재적 독재자도 그렇다. 그럼에도 위장(僞裝)에 속지 말아야 한다. 속으려고 작정한다면 모를까 속지 않아야 주인이다.

내일이 대선이다. 주인다운 주인이 되려면 누가 '선출된 독재자'가 될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런 판단을 하는 데 대단한 지력(智力)이나 혜안(慧眼)이 필요하지는 않다. 이미 이재명은 '다수 독재'를 예고한 터다. 기본 상식, 기본 양심, 기본 도덕심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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