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세계 전쟁사에 빛나는 안시성 전투, 그 전장은 어디인가(1)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안시성에서 패전하고 회군한 당 태종 이세민.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안시성에서 패전하고 회군한 당 태종 이세민.
요녕성 해성시 영성자 산성 유적 표지석.
요녕성 해성시 영성자 산성 유적 표지석.
요녕성 지도, 요하 동남쪽에 안산, 해성, 개현, 영구 등의 지명이 보인다.
요녕성 지도, 요하 동남쪽에 안산, 해성, 개현, 영구 등의 지명이 보인다.
요녕성 행정구역도.
요녕성 행정구역도.

◆세계 전쟁사에 빛나는 안시성 전투

한국 역사상에는 세계 전쟁사에 빛나는 여러 전투가 있다. 예컨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강감찬의 귀주대첩, 이순신의 명량대첩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 민족의 긍지를 드높여준 가장 자랑스러운 전쟁을 꼽는다면 안시성 전투를 들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의 한 작은 성의 힘만으로, 중국 한족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평가되는 당 태종 이세민의 당나라 대군을 무릎 꿇린 우리 민족의 쾌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안시성 전투가 벌어졌던 정확한 장소가 어디인지 또 당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안시 성주 양만춘은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것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전으로 인해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 이세민이 정부 주도로 국사 편찬을 시작하면서 고구려사를 심각하게 왜곡했고, 특히 안시성과 양만춘 장군 관련 자료를 철저히 말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대 한국의 역사학은 명나라 이후 형성된 사대사관과 대일항쟁기에 형성된 식민사관을 탈피하지 못한 채 자주적인 한국사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일본인의 눈으로 한국사를 바라본 식민사관, 중국인의 눈으로 한국사를 바라본 사대사관을 답습하며 지금껏 한국인의 눈으로 한국사를 바라본 한국사관이 결여되어 있다.

예컨대 안시성 전투는 발해유역의 강력한 지배자 고구려제국이 중국 대륙의 한 복판에서 신생국 당나라와 싸워 이긴 우리 민족의 위대한 전쟁인데 중국은 그것을 한반도 서쪽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왜곡했고 한국사학은 중국의 그러한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했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은 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국내의 통일전쟁이며 고구려는 독립 국가가 아닌 중국의 변방정권이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심지어는 이런 논리를 중국의 대학 교재에 실어 가르치는 어이없는 짓까지 벌이는 데도 한국사학의 이에 대한 대응은 가만히 숨죽이고 있거나 아니면 오히려 저들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한심한 경우도 없지 않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다.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한 안시성 전투, 지금까지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안시성 전투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고구려의 잃어버린 대륙영토와 역사주권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이 아니겠는가.

먼저 남북한 학계와 중국학계의 안시성 관련 관점을 검토하고 이어서 필자의 견해를 소개함으로써 세계 전쟁사에 빛나는 안시성 전투의 정확한 전장을 객관적인 사료에 근거해 밝혀보고자 한다.

◆안시성의 위치에 대한 한국 반도사학의 관점

이병도는 '한국고대사연구, 1976' 제6편 제5 '고구려 대수당항전' 조에서 "안시성은 지금 해성(海城) 동남쪽에 있는 영성자(英城子)이다"고 말했다.

이기백은 '한국사강좌, 1982' 고대편 제5장 제1절 '신라의 반도통일과 발해의 건국'에서 "고구려가 당태종의 침략군을 안시성(영성자) 전투에서 격파하여 물러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기동은 '한국사강좌1, 1982' 고대편 제3장 제3절 '대외관계의 변천'에서 "안시성(해성 영성자)"라고 표기하고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안시성의 위치 비정 문제는 종래 의견이 분분하여 이를 '금사(金史)' 지리지에 따라 개평 동북의 탕지보(湯池堡)에 비정하는 설과 이를 '아방강역고'에 따라 봉황성에 비정하는 설 등이 있었으나 봉천성 해성의 동남 약 2방리(二方里)에 있는 영성자 산성에 이를 비정하는 것이 옳은 듯하다. 이에 대하여는 도전호(島田好) '고구려의 안시성의 위치에 대하여'(역사지리 49의 1, 1927) 참조."

그리고 이기동은 고구려의 대수, 대당 항쟁을 도표로 작성했는데 거기서 고구려의 신성, 현도성,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건안성, 안시성, 오골성, 비사성을 모두 오늘날 요녕성 요하의 동쪽에 표시하였다.

이상에서 우리는 반도사학을 대표하는 이병도, 이기백, 이기동은 해성 영성자를 안시성의 고대 유적지라고 보았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해성 영성자는 오늘날의 어디인가.

해성은 중국 요녕성 관할의 현급시로서 요녕성 중남부 요하 하류의 좌측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후 1954년 요동성과 요서성을 합병하여 요녕성을 설치하고 해성현을 요녕성 요양에 귀속시켰다. 1959년에는 안산시(鞍山市)에, 1967년에는 다시 영구시(營口市)에 귀속시켰다. 1985년 해성현을 폐지하고 현급 해성시를 설치하여 안산시에 귀속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성자 산성은 요녕성 해성시 팔리진(八里鎭) 영성자촌에 위치한 고구려시대의 산성이다. 유적지의 면적은 2천472미터에 달한다. 요녕성 문물 고고대가 1956년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1962년 중국 고고학계가 고구려의 산성 문화유적으로 발표했고 1999년 요녕성 고고연구소와 안산시박물관이 합동으로 대대적인 발굴작업을 진행하여 해성시 영성자 산성이 1천600년 전 고구려 중, 만기시대 문화유적이라고 확정하였다. 현재 시급 중점문물로 보호되고 있다.

◆안시성의 위치에 대한 한국 민족사학의 관점

단재 신채호가 저술한 '조선상고사'는 하권 제10편 제3장에서 '안시 전역(安市戰役)'이란 이름으로 안시성 전투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여기서 단재는 "안시성은 환도성이다"라고 말했다.

단재는 안시성과 환도성을 동일시했는데 단재는 고구려에 3개의 환도성이 있었다고 보았다. 오늘날 만주 개평(蓋平)에 제1 환도성, 환인현 혼강 상류에 제2 환도성, 집안현 홍석정자 산상에 제3 환도성이 있었다고 하였다. 단재가 말하는 안시성은 3개의 환도성 중 어떤 환도성을 가리킨 것일까.

단재가 '조선상고사'의 '안시성 전투'에서 설파한 여러 가지 언급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지금의 개평을 안시성으로 간주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개평은 단재 생존시의 봉천성 개평현(蓋平縣), 현재의 요녕성 개주시(蓋州市)를 말한다. 개주시는 요녕성의 현급시로서 영구시(營口市) 관할이다. 요하의 동쪽에 위치하여 반도사학에서 안시성이라 주장하는 요녕성 해성시와 바로 이웃하여 그 남쪽에 있다.

민족사학자들 가운데 안시성의 위치에 대해 반도사학이 주장하는 해성시 설에 대해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거나 이를 반박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민족사학의 안시성 위치에 대한 견해는 단재의 요녕성 개주설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성시와 개주시는 멀리 동떨어진 지역이 아니고 바로 요하 동쪽에 서로 이웃해 있기 때문에 반도사학과 민족사학의 주장은 유사하며 완전히 다른 견해라고 말하기 어렵다.

◆안시성의 위치에 대한 북한 학계의 관점

'조선전사'(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는 3권 고구려사, 제8장 제2절 '안시성 전투의 빛나는 승리'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 서북변방지대에서 중요한 군사 요새의 하나였던 안시성(해성 부근 영성자 산성)을 지켜내는 것은 645년 당나라 침략군의 침입을 반대하는 전쟁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북한 학계에서도 남한의 역사학계와 동일하게 중국 요녕성 해성시에 있는 영성자 산성을 고구려시대의 안시성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전사'의 안시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안시성은 고구려가 요하 유역에 설치하였던 전방 방어 성들인 신성, 요동성, 건안성, 개모성, 백암성, 비사성 등 성들 가운데서 군사 전략적으로 보아 요동성 다음가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특히 안시성은 신성과 건안성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으며 오골성을 거쳐 압록강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러므로 안시성의 성과적 방어는 요동지방의 여러 성들의 방어에 직접 큰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고구려의 중심으로의 적군의 침공을 막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상의 기록을 검토해보면 북한 학계는 고구려 시대의 요하를 현재 요녕성의 요하로 보았고 고구려가 서북방방어를 위해 구축한 전방 방어성들인 신성, 요동성, 건안성, 개모성, 백암성, 비사성 등이 모두 현재의 요하유역 동쪽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인식했다.

특히 전방의 방어 성들 가운데 적군의 침공을 막는데 군사 전략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던 안시성은 "오골성을 거쳐 압록강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당태종이 침공한 안시성이 요하동쪽 압록강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안시성의 위치에 대한 중국학계의 관점

중국은 동북공정을 시작한 이후 그들의 동북공정 이론을 정리하여 마대정(馬大正) 주도하에 '중국변강통사총서'를 펴냈다. '동북통사, 2002)'는 이치정(李治亭)이 주편을 담당했다.

'동북통사'는 제4편 제3장 '당과 고구려의 전쟁' 부분에서 당 태종의 고구려 공격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거기서 "안시성은 지금의 요녕성 해성시 동남쪽 15리에 있는 영성자둔(英城子屯)이다"라고 말하였다.

고문덕(高文德)이 주편한 '중국소수민족사대사전, 1995'에 따르면 "안시성의 위치에 대해 종래에는 중국학계에서 영구시(營口市) 동남쪽 탕지진(湯池鎭)으로 보는 설, 요녕성 봉성현 봉황산으로 보는 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존재했으며 통일된 견해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요녕성 해성시 영성자 산성을 옛 고구려의 안시성으로 보는 것이 중국 역사학계의 공식적 입장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성자촌은 이곳이 고구려시대 유적이라는 것 외에는 안시성임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떠한 문헌적 고고학적 근거도 전혀 발굴된 바가 없다. 단지 영성자 산성이 고구려시대 유적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을 근거로 중국의 고고학계가 그것을 일방적으로 안시성 유적이라고 단정했을 뿐이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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