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선전하는 존재가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다. 통신사가 조선의 선진문명과 문화를 일본에 전수해 주었다는 것이다.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행차할 때 머무는 곳마다 이들과 교류하려는 일본 유학자·지식인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면서 K-컬처의 원조라고 자랑이 대단하다. 과연 이런 주장은 어느 정도나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과 부합할까? 통신사란 조선시대에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이다. 1403년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3대 쇼군(征夷大將軍)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가 사신(일본국왕사)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일본 간에 정식 국교가 시작됐다. 조선은 태종 시절부터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는데,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조선에선 18회 파견했고, 일본국왕사의 조선 파견은 71회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양국 국교가 단절되었고, 1603년 3월 24일 도쿠가와(德川)막부는 쓰시마 번을 통해 국교 재개를 요청해 왔다. 1609년(광해군 1)에 양국은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양국 간 국교가 재개되었다. 이후 조선은 도쿠가와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에도(도쿄)에 12차례 통신사를 파견했다. 일본 측은 60여 차례 일본국왕사를 조선에 파견했다. 도쿠가와막부는 지리상 가까운 쓰시마 도주(島主)에게 조선과의 외교를 일임했는데, 조선 정부는 쓰시마 도주를 '준신하(準臣下)'로 하대했다. 쓰시마에서 조선에 보내는 외교 공문서에는 조선의 종주국인 중국 황제 연호와 조선 정부가 구리로 새겨 보낸 관인(감합지인·勘合之印)을 찍어 보내도록 했다. 조선 정부가 관인을 일본에 보낸 것은 일본을 한 수 아래로 낮춰 보았음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조선과의 외교관계가 필요했던 도쿠가와막부의 쇼군은 굴욕을 참고 자신을 '대군(大君)'으로 낮춰가며 교류를 재개했다. ◆일본 측이 통신사 행차 비용 700억 엔 부담 통신사의 이동 거리는 왕복 4천150km, 이동 시간은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년 걸리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통신사 행차 비용은 조선 구간은 조선 측이, 일본 관내에서 드는 비용은 막부가 부담했다. 막부는 통신사 행차 비용으로 총 100만 냥(현재 화폐가치로 700억 엔)을 지출했다. 제임스 루이스 옥스퍼드대 교수는 막부가 일본 쌀 연간 수확량의 12%를 통신사 접대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도쿠가와막부는 통신사 행차를 위해 선박 1천400여 척, 짐 운반을 위한 일꾼 33만 명, 8만 마리의 말을 제공했다. 통신사 행렬의 선두에는 의장대가 장엄한 곡을 연주했고, 화려한 복색을 차려입은 통신사 일행이 행진했다. 뒤에서는 조선의 명물인 마상재(馬上才,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 가지 기예를 부리는 마상무예) 공연을 펼쳤다. 통신사 행렬이 시가지를 통과하는데 무려 5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통신사가 머무는 지역마다 일본의 세력가들은 통신사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글씨나 그림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왕복 1만 리가 넘는 거친 여정과,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가며 통신사를 파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국가적 위기를 경험했다. 때문에 주기적으로 일본 현지 정황을 정탐하고, 우호 관계를 통해 재침을 예방해야 했다. 특히 명·청 교체기를 맞아 북방에서 여진족이 준동하자 남쪽 지역의 안정을 위해 통신사를 파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이 통신사를 초청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도쿠가와막부는 자신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력이란 사실을 국내에 전파하기 위해 통신사를 적극 활용했다. 그들은 실리 외교를 위해 겉으로는 조선에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신(神)의 나라' 일본은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게 우월하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도쿠가와막부는 일본 백성들에겐 통신사를 서쪽 오랑캐 나라에서 온 조공 사절로 선전했다. 또 나가사키에 상관을 설치한 네덜란드에는 조선이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인식시켜 네덜란드가 조선과 직접 교역하지 못하도록 했다. 막부가 통신사를 초청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도쿠가와막부는 거액의 통신사 행차 비용을 통신사가 통과하는 지역의 번을 다스리는 다이묘(영주)들에게 부담시켰다. 이런 방식으로 각 번의 경제력을 소진시켜 막부에 대항하는 군사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싹을 잘라버렸다. 말하자면 통신사를 이용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이었다. 도쿠가와막부는 17세기 초 나가사키에 오늘날 경제특구에 해당하는 데지마를 설치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한 나라에만 교역을 허가했다. 그 대가로 네덜란드는 자국 동인도회사 정보망을 통해 수집한 세계 동향 정보를 제공토록 했다. 이것이 풍설서다. 네덜란드 상관장은 막부에 풍설서를 제출하기 위해 총 164회 막부의 수도 에도(도쿄)를 방문했다. 통신사의 에도 방문 횟수 12회보다 14배나 많은 행차였다. 막부는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자국의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상세한 국제 정치·경제 동향 정보를 입수했다. 통신사를 통해 수집하는 정보의 질이 계속 낮아지자, 막부는 1811년 제12차 통신사를 쓰시마에서 적당히 대접한 후 돌려보냈다. 학자들은 이것을 역지빙행(易地聘行)이라고 말한다. 이것으로 통신사 교류는 막을 내렸다. ◆17~18세기 일본의 놀라운 번영 조선은 1644년 중화의 원조 명나라가 여진족에게 멸망하자 소중화를 자처하며 자신이 이 세상 유일의 중화 문명 수호국이라는 멍청한 우월 의식에 빠졌다. 그 시기에 일본은 이와미(石見) 은광에서 생산되는 은을 가지고 국제 무역을 하여 국부를 창출했고, 서양 학문과 기술, 문물을 받아들여 번영을 구가했다. 일본 상인 집단은 중국 남부와 베트남의 호이안, 캄보디아, 태국, 믈라카해협, 자카르타, 마닐라, 대만에 상관을 설치하여 동남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대 무역망을 연결했다. 막부의 쇼군이 거주하는 에도에는 1653년 상수도가 완공돼 시민들이 위생적인 수돗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오이시 마나부, '일본 근세도시 에도의 기능과 성격', 도시인문학연구 1호, 2009). 18세기 초 에도 인구는 100만 명, 오사카와 교토는 40만 명이 넘었고, 각종 근대적 인프라를 갖춘 세계적 대도시로 발전했다. 조선의 수도 서울은 20세기 초 인구가 25만 명에 불과했다. 특히 일본은 오래전에 주자학을 폐기하고 고증학·양명학·난가쿠(蘭學)를 학문의 주류로 삼았다. 17~18세기 일본은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학문이나 과학기술 수준이 조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서 있었다. 통신사 수행원들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의 발전상에 대한 찬사가 상당수 발견된다.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는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을 예로 들어 해외무역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특히 통신사를 통해 일본 고학(古學·양명학)의 연구 성과가 조선에 수입돼 정약용 등 실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후마 스스무(夫馬進) 일본 교토대 교수를 비롯한 여러 학자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1711년(숙종 37), 제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徳川家宣)의 취임 축하를 위해 제8차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됐다. 정사 조태억, 부사 임수간을 비롯한 대표들은 11월 5일 에도에서 일본의 근대 지식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와 대화했다. 임수간이 남긴 '동사일기'(東槎日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발견된다. '조태억 : 천하가 오랑캐를 따르지만, 우리나라만은 대명(大明)의 제도를 고치지 않았다. 오로지 우리가 동주(東周, 동쪽의 주나라라는 뜻)다.' '아라이 하쿠세키 : 그런데 왜 명나라 옷을 입고 있는가. 그나마 청나라가 봐줘서 그 정도 아니겠는가? 대서양과 구라파의 이탈리아, 네덜란드 사람들을 직접 보았고, 지금 공들과 한집에 있으니 기이하다.' '임수간 : 대서양은 서역 나라 이름이다. 구라파와 이탈리아는 어느 곳에 있는가?' '아라이: 귀국에는 만국전도가 없는가?' ◆일본 서점에 큰 충격 받은 통신사 1719년 제9차 통신사 홍치중을 따라 제술관으로 일본을 다녀온 신유한은 "오사카에는 수많은 책이 있어 실로 천하 장관이었다. 오사카의 서점에 가 보니 중국 남경에서 수입한 책이 1천여 종, 민간에서 간행한 각종 문집과 특이한 책이 조선의 100배가 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시기 조선에는 서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몰래 책을 팔러 다니는 책쾌(冊儈)라 불리는 비밀 서적상이 있었는데, 이들이 책을 판매하다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유한은 김성일의 일본 견문록인 '해사록', 유성룡의 임진왜란 기록인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 같은 기밀에 속하는 책이 오사카에서 버젓이 출판 유통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내가 통신사 사행 중에 쓴 시문이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보니 벌써 책으로 묶여 출판되고 있으니, 이 엄청난 속도에 어안이 벙벙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11차 통신사의 서기 김인겸의 1764년 오사카 방문 기록을 소개한다. "100만 채 가까운 집 모두는 기와집이다. 오사카 부호 집은 '조선 최대의 대저택'의 10배 이상 넓이로, 구리 기둥에 내부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도시 크기는 40km 정도로 모두가 번영하고 있다.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낙원이란 오사카의 일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도시가 있을 수 있을까? 한양 번화가 1만 배의 발전이다. 북경을 접해본 통역 통신사가 있지만 그도 "북경의 번영도 오사카에는 진다"라고 말했다. 짐승 같은 인간들이 2천년 동안 이렇게 평화롭게 번영하고 있었다니 원망스럽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아간 조선 도공이 제작한 채색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여 만국박람회의 최우수상을 싹쓸이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무역선이 1650년부터 1세기 동안 유럽으로 수출한 일본 도자기가 무려 520만 점이었다. 일본 도자기 포장지에 그려진 전통 그림 우키요에(浮世絵)가 유럽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19세기 중반 모네, 마네, 반 고흐 등 이 일본 문화에 심취, 인상파 성립에 결정적 영향 끼친 사실을 우리만 모르고 있다. 아니,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고 애오라지 통신사가 일본에 선진문화·문명을 전해주었다고 국뽕에 심취해 자랑만 일삼는다.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2025-07-08 04:30:00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40> '슬로푸드의 성지' 이탈리아
연일 폭탄이 터진다. 사랑·박애·자비를 지향하는 그들의 종교는 언제부터인가 '인류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지워내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이제 서로에게 하나의 '흉기'가 되어버렸다. 천국을 겨냥한다지만 실은 둘의 관계는 지옥만큼이나 음울하기만 하다. 그리고 자본주의란 이 냉혹한 하늘 아래 웅크린 인권 역시 '빈익빈 부익부'로 왜곡된다. 사람들은 자본으로 인해 지쳐버린 가슴을 힐링하기 위해 느릿느릿 '여행'하지만 실은 또 다른 자본을 소비할 따름이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이고 모순적인가. 그걸 알면서도 나는 징글징글한 요놈의 욕망을 데리고 12시간 너머에 있는 '슬로푸드'의 성지로 불리는 이탈리아로 날아간다. ◆지중해 햇살 이오니아해, 에게해, 아드리아해…, 지중해의 햇살은 유백색 대리석을 닮았다. 바닷물에 닿으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돌로 불리는 '청금석'의 질감이 뿜어져 나온다. 나폴리, 그리고 카푸리, 시칠리아섬, 마지막엔 유럽 은퇴자들의 마지막 휴양지로 불리는 토스카나의 햇살을 함께 친견해봐야 한다. 그래야 슬로푸드의 질감을 감지할 수 있다. 지중해의 윤슬을 친견한 뒤 '끝판 전원풍경'으로 평가받는 토스카나 지방으로 갔다.지평선까지 이어진 대구릉의 합창을 엿들었다. 봉홧불처럼 타오르고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 영화 '글래이디에이터'의 첫 장면이 떠올랐다. 발도르차 평원, 그 중간 사이프러스 나무가 담양 메타세콰이어 길처럼 도열한 주인공 막시무스의 집이 있는 곳이다. 그 나무 옆에 그리스신화 시절부터 함께 했던 올리브나무, 그리고 유럽의 와인의 출발점인 포도나무가 햇살과 한 세트로 묶여다니면서 묘한 이국적 정서를 부여하다. 포도는 석회질의 땅을 좋아한다. 석회질 토양이라 물맛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생수값이 우리보다 두 세배 이상 비싸다. 식당에 가도 공짜 물이 없다. 돈을 주고 사 먹어야 된다. 하지만 포도에게는 더없이 유익하다. 뿌리가 10미터는 족히 수직으로 뻗어 내려간다. 그래서 일급 와인이 가능하다. 이동 간 관광버스 안에서 수십 번은 봤을 것 같은 오드리햅번 주연의 '로마의 휴일'을 정독했다.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주인공 앤 공주의 한 대사가 귀국 후까지 귓가에 쟁쟁했다. '나는 앵무새가 아니란 말이예요!' 그럴지도 모른다. 다들 앵무새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밥벌이' 탓에 앵무새가 된다. 황제와 노예가 공존했던 로마제국.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상 길의 귀결점이었고, 반드시 따라야 하는 법의 도시, 그 로마에는 여러 종류의 식당이 있다. '오스테리아'(Osteria)와 '트라토리아'(Trattoria). 둘은 모두 이탈리아 가정식 레스토랑이다. 가족이 경영하는 가정식이면 트라토리아, 가족 경영이 아니면 오스테리아.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최고급 풀코스를 즐길 수 있는 건 '리스토란테'(Ristorante). ◆이탈리아 푸드의 정수 프랑스가 양식의 교범이라지만 그걸 가능하게 된 건 이탈리아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카타리나 공주가 프랑스에 시집가면서 데려간 요리사들이 프랑스에 다양한 요리를 전파시킨다. 1861년 통일을 이룬 이탈리아 음식은 크게 남부와 북부가 크게 차이가 난다. 각각의 요리 특색을 보자면 나폴리, 시칠리아 등의 남부는 해안가라서 해산물 요리가 발달했으며, 맵고 짠 강한 맛이 특징이다. 또한 토마토소스를 쓰는 피자와 파스타가 발달했다. 반면에 베네치아, 볼로냐, 밀라노, 제노바 등 북부 지방은 알프스산맥에 접하고 있어서 육류와 치즈를 이용한 요리가 많고 남부보다 리조토와 같은 쌀 요리를 많이 먹는다. 이탈리아는 타민족 음식에 대해 상당히 거부감이 많다. 외국 음식을 거의 안 먹는 나라다. 세계 미식의 최고봉 프랑스에도 이탈리아 식당이 있지만 이탈리아에선 프랑스 식당을 보기 참 힘들다. '로마의 휴일' 촬영 장소였던 로마의 스페인광장 계단 옆에 맥도날드가 생길 움직임이 보이자 지식인, 언론인, 사회운동가 등이 모여서 개업 저지 데모를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발 슬로푸드 언젠가부터 이탈리아는 '슬로푸드의 성지'가 된다. 슬로푸드 운동은 1986년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을 시작한 카를로 페트리니와 그의 동료들은 패스트푸드 업계의 대명사인 맥도날드가 로마의 스페인광장에 진출하자 발끈한다. 자국 음식에 대한 기준과 원칙을 정하면서 전통음식 보존을 위한 새로운 연대를 시작한다. 그 움직임은 나중에 '슬로푸드 운동'의 모태가 된다. 한국에 지부를 둘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간 이탈리아에서는 중국 음식 정도가 이국 음식의 대부분이었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가 간혹 눈에 띄지만 대개는 여행자용 식당이다. 이탈리아인은 먹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이탈리아인은 하루 무려 5끼를 먹는다. 조선조 왕과 비슷했다. 맨 먼저 먹는 음식이 '콜라지오네', 이때는 에스프레소 한잔에 비스켓 정도로 해결하고 오전 11시에는 '스푼티노'란 간식을 먹고, 점심(프란조), 오후 5시에 간식인 '메란다', 저녁(체나)을 먹는다. 길게 먹을 경우 무려 3시간 동안 즐긴다. 특히 로마제국 시절 로마인은 먹기 위해 태어났을 정도로 먹는데 목숨을 걸었다. 그걸 본 사상가인 세네카가 이렇게 비난을 한다. '로마인은 먹기 위해 토하고 토하기 위해 먹는다.' ◆파스타 & 피자 파스타는 '인파스타래리'라는 이탈리아말에서 온 것으로 '밀가루를 물과 반죽한 것의 총칭'이다. 나비와 바퀴, 알파벳 등 모양과 당근, 오징어먹물, 시금치 등 재료에 따라 수백여 가지가 있다. 단면이 동그란 면을 보통 '스파게티'라고 한다. 파스타는 에피타이저와 메인 사이에 먹는다. 파스타는 생파스타와 마른 파스타로 양분된다. 건조 파스타는 '두럼'이란 밀을 빻아 만든 '세몰리나'가 주재료다. 파스타는 물 대신 달걀로 반죽해 아주 쫄깃하다. 사용하는 면과 소스에 따라 무척 다양한 조합이 가능한데, 잘 알려진 것으로는 크림소스인 '카르보나라', 볼로냐 지방에서 유래한 토마토미트소스의 '볼로냐', 이탈리아어로 '조개'라는 뜻의 '봉골레' 등이 있다. 이 외에 가운데에 소를 넣고 싸서 만드는 만두와 비슷한 '라비올리', 감자와 밀가루 반죽으로 수제비처럼 생긴 '뇨키' 등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이탈리아에는 파스타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따로 있어서 1년에 한 번씩 모여서 발표회를 갖기도 한다. ◆피자의 기원 일단 현대판 피자는 이탈리아가 종주국이지만 그 기원은 튀르키예의 전통빵인 '피데'이다. 이게 그리스 등 서남아시아권을 배회하다가 나중에 이탈리아에서 현재 형태의 피자를 완성하게 된다. 피자만드는 사람은 '피자이올로'라고 한다. 파는 전문점은 '피자리아'다. 우리의 도자기 장인 이상의 기술자로 인정을 받는데 이 피자의 레시피는 현재 이탈리아 국가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피자도 여러 스타일이 있다. 보통 나폴리 스타일과 로마 스타일로 나눠진다. 로마 스타일은 얇고 바삭하고 나폴리 스타일은 빵이 도톰하고 부드러운 게 특징. 이탈리아 사람들의 피자 전통에 대한 보존의식이 대단하다. 피자가 원형을 잃어간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나폴리의 유서 깊은 피자리아 관계자들이 1984년 한 자리에 모인다. 바로 '진정한 나폴리 피자 협회'(AVPN)를 결성한다. 협회는 나폴리 전통과 관습대로 생산한 피자의 가치를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밝힌다. 2004년 급기야 이탈리아 정부에 정통 나폴리 피자의 재료와 요리법을 규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와인처럼 지역특산품으로 인증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미국식 피자는 이탈리아와 달리 도우가 두툼하고 위에 토핑도 더 다양하다. 보통 뉴욕과 시카고 스타일로 양분된다. 뉴욕형은 상대적으로 얇은데 얇은 도우 위에 토마토소스를 바르고 치즈를 올리고 그 위에 페페로니로 토핑한 게 특징이다. 시카고 피자는 깊은 그릇에 굽는다고 해서 '시카고 딥 디쉬'라고도 한다. 일반 피자와는 다르게 움푹한 파이팬에 다양한 토핑과 치즈를 넣고 오븐에 구워 낸다. 두께가 2~3cm로 굉장히 두꺼운 편이다. 가장 이탈리아스러운 건 토마토케첩·치즈·바질 토핑의 '마르게리타'이다. 이탈리아는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먹지만 미국식은 손으로 뜯어먹는다. 이탈리아식은 화덕에서 굽지만 미국식은 팬에서 굽는 게 특징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피자가게는 1972년에 등장한다. 한국의 피자는 뉴욕보다 시카고형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원샷 에스프레소 이탈리아에 와서 아메리카노를 찾으면 참 난감하다. 본토에서는 역시 에스프레소에 엄지척한다. 그들은 찔끔찔끔 마시지 않는다. 약을 먹듯 한입에 털어 넣어버린다. 고속도로 휴게소 카페존에 가면 1회용 봉지 설탕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우리는 원액만 즐기지만 그들은 설탕을 섞는다. 나도 봉지를 찢어 잔 안에 설탕을 모두 쏟아붓고 한입 가득 삼켰다. 1929년 무솔리니와 신사협정을 통해 성베드로대성당이 있는 바티칸시국이 개국된다. 요즘 세계의 관광객이 여기로 몰려든다. 평생 지은 죄를 면죄받을 수 있는 '대희년'이 있는 해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보고 나와 그늘에 퍼질러 앉아 젤라토를 먹었다. 주위를 돌아봤다. 브랜드의 세상이었다. 세계 최강 패션 브랜드숍이 사라진 로마 황제 같았다. 대구의 이탈리아 요리는 2000년대부터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현재 특별한 두 가게가 남구 대명9동에 있다. 구자태·구자덕 형제가 운영하는 '국수'와 '지오네'이다. 형은 2001년 중구 삼덕성당 뒤편에 있는 '이태리 앤 이태리'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때 인투, 디종, 소렌토, B2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wind3099@hanmail.net
2025-07-04 04:30:00
지난 대선에서 승리한 이재명 대통령은 여전히 선거가 진행 중이다. 취임과 동시에 지난달 영호남을 바쁘게 아우르며 지역 민심을 골고루 챙겼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까지 불참하면서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이 대통령이 '현장 행정'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내년 6월 '지방선거 지원'에 나섰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대통령은 방문 지역의 오랜 현안에 대한 '해결사'로서 전면에 나서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광주를 찾아 '광주 군(軍) 공항의 무안군 이전'에 대해 "국가 단위에서 책임지는 게 맞다. 전남, 광주, 무안, 국방부,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에 지역 주민과 외부 전문가까지 해서 TF(태스크포스)를 꾸리고 최대한 빨리 속도를 내는 것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광주 군 공항 이전'은 광주·전남의 오랜 숙원 사업이다. 광주와 무안군, 전남도 사이에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공항 이전 문제를 정부가 직접 나서서 주도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대통령이 약속한 것이다. 광주에 있는 공항이 무안으로 옮겨져 무안공항이 확장되면 호남 지역의 숙원 사업이기도 한 '서남권 관문 공항' 건설이 가능할 수 있다. 이미 이전지까지 정해지고도 재원 마련이 여의치 않아 계속해서 딜레이되는 대구경북신공항과는 비교가 되는 상황이다. 이 대통령은 광주뿐만 아니라 지난달 20일에는 SK, 삼성SDS, LG, 카카오 등 기업 총수들을 대거 이끌고 울산에서 열린 7조원 규모의 'AI 데이터센터' 출범식에 참석, "첨단기술산업이 지방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어 지난달 24일 국무회의에서는 '해수부 부산 이전'을 연내에 마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북극항로 개발을 위해 부산을 전초기지로 정하고, 컨트롤타워를 맡을 해수부가 부산으로 가야 한다는 논리다. 또한 국내 최대 해운선사인 HMM의 본사도 부산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깜짝 선물'까지 발표했다. 이 같은 행보는 해수부 장관에 부산이 지역구인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지명한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게 부산 정가의 반응이다. 부산의 유일한 민주당 의원인 전재수 해수부 장관 후보자를 차기 부산시장으로 만들기 위한 '큰 그림'이란 얘기다. 최근 만난 여권의 한 인사는 "이재명 정부와 여당은 내년 지방선거를 크게 승리해야만 국정 운영 동력에 계속적인 힘이 실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대구경북을 제외한 전국의 광역단체장을 싹쓸이했던 지난 2018년 지방선거의 재연을 위해 선거 1년 전부터 대통령까지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국민의힘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이 퇴임 기자회견을 열고 "이 당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는 깊은 기득권 구조가 있다면, 그 기득권이 당의 몰락을 가져왔으면서도 근본적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면, 국민의힘에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며 "'이 당은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당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당내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린 김 위원장이 그간 '보수 재건'을 부르짖었지만, 당 주류에 막혀 허우적댄 47일간의 한숨 소리로 들렸다. 이처럼 정권을 내주고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국민의힘을 보고 있으면, 입법부·행정부에 이어 사법부까지 거머쥔 여권이 내년 지방정부마저 독차지할까 걱정이 앞선다.
2025-07-02 18:27:22
대구 달성군은 1일 민선 8기 출범 3주년을 맞아 군청 대강당에서 기념식을 열고, 지난 성과를 되돌아보며 남은 임기 동안의 비전과 추진 전략을 공유했다. 이날 행사에는 군청 및 직속기관 직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군정 발전에 기여한 모범 공무원에 대한 표창 수여도 함께 진행됐다. 최재훈 달성군수는 "군민의 기대에 보답하고자 앞만 보고 달려온 3년이었다"며 "남은 임기 동안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27만 군민들과의 약속을 1천여 공직자들과 함께 책임있게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2025-07-02 14:59:46
유리 예르비아호 주한 핀란드 대사, DGIST서 과학기술·교육 협력 논의
유리 예르비아호(Jyri Järviaho) 주한 핀란드 대사가 2일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을 방문, 과학기술 및 고등교육 분야의 교류 확대와 실질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유리 예르비아호 대사는 DGIST 주요 보직자들과의 면담을 통해 핀란드 주요 대학 및 연구소와의 협력 가능성, 학생 및 연구자 교류, 공동 연구개발 등 다양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어 연구시설을 둘러보며 DGIST의 교육·연구 인프라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DGIST 관계자는 "이번 방문을 계기로 핀란드 대사관과의 긴밀한 협력을 이어가고, 글로벌 혁신 네트워크를 더욱 강화해 나갈 것"이라며, "양국의 과학기술 발전과 인재 양성에 실질적 기여가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핀란드는 첨단 ICT, 바이오, 에너지 등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한 국가로, 주한 핀란드 대사관은 국내 여러 대학 및 연구기관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이번 DGIST 방문을 계기로 한-핀란드 간 과학기술 협력이 한층 더 심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2025-07-02 14:49:40
달서중·고교 세천 이전, 2027년 3월 개교 향해 순항
대구 달성군은 여름철 집중호우 등으로 인한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쾌적한 교육환경 조성을 위해 최근 다사읍 달서중·고등학교 세천 이전 신축 공사 현장을 방문해 종합적인 점검을 실시했다고 1일 밝혔다. 이날 최재훈 달성군수는 사업 현장에서 공사 관계자들로부터 공정 현황을 청취하고, 장마철 대비 안전관리 실태와 통학로 주변 환경을 꼼꼼히 점검했다. 달서중·고교 이전 신축공사는 지난 2월 착공돼 현재 터파기, 사면보강, 옹벽공사가 한창이며 7월 말쯤 교사동 지하층 골조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최 군수는 현장 관계자들에게 "올해는 평년보다 긴 장마가 예상되는 만큼 집중호우, 태풍 등 자연재해에 대비한 배수와 침수 방지시설, 가설물 안전 상태, 비상 대응체계 등을 잘 살피고, 안전수칙 준수 등 위험 요소도 사전에 제거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세천으로 이전하는 달서중·고교는 아이들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안전한 학교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복합시설로 조성할 것"이라며 "앞으로도 학교, 대구시교육청과 함께 공정을 세밀히 챙겨 2027년 예정대로 개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달서중·고교는 2027년 3월 개교를 목표로, 현재 토목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달성군은 공사 기간 내내 정기적인 현장점검을 실시하고, 인근 주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관리할 계획이다.
2025-07-01 15:33:56
노영삼 달성소방서 제20대 서장 취임…부임 첫 행보로 대형화재 현장점검
대구 달성소방서 제20대 서장으로 노영삼 신임 서장이 1일 취임했다. 노 신임 서장은 이날 부임 첫 행보로 달성군 구지면 쿠팡 대구3물류센터와 엘앤에프 1·2공장 등을 현장점검했다. 이번 현장점검은 대형화재 예방 및 안전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마련됐다. 노 신임 서장은 "현장에 답이 있다는 신념으로 대형화재 예방을 위한 철저한 현장점검을 통해 달성군민에게 더욱 신뢰받는 소방조직으로 거듭나겠다"고 취임 소감을 밝혔다. 경남 합천 출신인 노 신임 서장은 지난 1990년 소방사 공채로 공직에 입문해 대구소방안전본부 예방안전과장, 대구강북소방서장 등을 역임했다.
2025-07-01 15:20:12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에너지환경연구부(융합전공 겸직) 김대환·성시준 연구팀이 앞뒤로 모두 태양빛을 받아 발전할 수 있는 '양면수광 태양전지 기술'을 개발했다고 DGIST가 1일 밝혔다. 이 기술은 낮은 온도에서도 제작이 가능해 생산 공정이 간단하며, 향후 건물형 태양광 발전, 농업용 태양광 발전, 고효율 탠덤 태양전지 등에 폭넓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근 태양광을 양면에서 동시에 빛을 흡수해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양면수광 태양전지가 주목받고 있다. 이를 구현하려면 빛이 통과할 수 있는 투명한 전극 기판을 사용해야 하지만, 내열성이 낮은 투명 전극 위에 박막 태양전지를 제작할 경우 우수한 특성을 얻기 어려웠다. 기존 박막 태양전지는 제작에 높은 온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에 DGIST 김대환·성시준 연구팀은 420℃ 이하의 낮은 온도에서 작동하며 좁은 띄간격을 갖는 화합물 박막 태양전지 기술을 개발했다. 김대환·성시준 책임연구원은 "이번 연구는 투명 기판을 사용한 박막태양전지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며 "투명 기판 기반 고효율 양면수광 태양전지 기술의 응용 범위를 더욱 넓혀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연구는 에너지환경연구부(융합전공 겸직) 김대환·성시준 책임연구원이 교신저자, 융합전공 Ali Amanat 박사과정생과 에너지환경연구부 전동환 전임연구원이 제1저자로 참여했다. 연구 결과는 재료 분야의 저명 학술지인 '어드밴스드 에너지 머티리얼즈' 온라인판 표지논문으로 게재됐다.
2025-07-01 09:42:16
[포토뉴스] 대구 달성군 옥포읍에 첫 소공원 생겼어요~
대구 달성군은 옥포읍 첫 소공원인 기세1·2소공원 조성사업을 완료하고, 주민을 위한 녹지 휴식공간으로 새롭게 탄생했다고 30일 밝혔다. 기세1소공원(535㎡)과 기세2소공원(1천259㎡)은 총 1천794㎡ 규모로, 공원에는 사각정자와 운동기구, 평상, 산책로, 잔디광장 등 주민 편의시설을 두루 갖췄다. 최재훈 달성군수는 "옥포읍에 첫 번째 소공원을 조성해 도심 속 부족했던 녹지 공간을 확보하고, 주민들에게 휴식과 소통의 장을 제공하게 되어 매우 뜻깊다"고 말했다.
2025-06-30 15:11:53
국립대구과학관, '로봇, 우리 곁으로 다가오다' 과학특강 열어
국립대구과학관은 오는 12일 오후 2시 과학관 1층 사이언트리홀에서 '로봇, 우리 곁으로 다가오다: 공상과학에서 현실로 뛰쳐나온 로봇'을 주제로 과학특강을 개최한다. 이번 국립대구과학관 특강은 첨단 기술과 로봇 산업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넓히고, 전문가와의 소통을 통해 과학문화 확산과 인재 양성에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국립대구과학관은 한국생산기술연구원과 협업, 이수웅 수석연구원이 첨단 로봇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흥미롭게 풀어내는 강연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강연 후에는 질의응답 시간도 마련돼 청중과의 깊이 있는 소통도 이뤄질 예정이다. 국립대구과학관 이난희 관장은 "이번 과학특강은 로봇을 주제로 첨단 기술을 쉽고 흥미롭게 풀어내는 소통의 장이 될 것"이라며 "관람객들이 첨단 기술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넓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강연은 전 연령이 무료로 참여 가능하며, 국립대구과학관 홈페이지(www.dnsm.or.kr)를 통한 온라인 예약 및 강연 당일 현장 접수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2025-06-30 10:17:31
[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부여인들의 기질과 생활
'역사학은 생명학이다.' 이 말은 '역사학은 행동학이다'라는 말과 짝을 지어 사용하는 내 역사이론이다. 역사와 달리 역사학은 기록을 근거로 해석해서 그 시대와 사람을 이해한다. 지나간 것들을 대상으로 삼기에 불가피한 점이 있지만 그것에만 의존하면 문제가 많다. 우리 역사, 특히 만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고조선·부여·고구려를 이해하는데는 치명적인 한계들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100년 전과 달리 사건의 니용과 사람의 성격 등 역사상을 다양한 학문, 심지어는 자연과학까지 활용하여 효율적으로 규명할 수 있다. 또한 사건의 현장들, 그들이 살았던 삶의 터전들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체험하고 정보를 구할 수 있다. 또 하나 현대는 역사의 주체를 과거와 다르게 인식하는 시대라는 점이다. 역사학의 연구 대상이 각종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과 권력쟁탈 과정, 전쟁 상황, 지배자들의 생활과 문화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소위 강단과 재야를 불문하고 역사를 연구하는 자세와 방법론을 대거 혁신해야만 한다. ◆부여인들은 말 잘 타고, 활을 잘 쐈다 그러한 점에서 부여의 역사, 즉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신앙과 세계관을 가졌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다. 우선 부여인들의 성격, 기질이 궁금하다.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교만하고 방자해졌다(後稍驕恣)"라는 기록이 있다. 나는 중국인들이 그 '교자'(驕恣)라는 단어 속에 숨긴 의미를 '자유의지'(free will)로 찾아냈다. 고구려가 부여의 기질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지만, 오랫동안 잊고 잃어버린 정체성의 핵이다. 또 부여전에는 이러한 글이 있다. "其人麤大, 性彊勇謹厚, 不寇鈔" 즉 부여 사람들은 크고, 성품이 강하고 용감하며, 근엄하고 덕이 두텁다. 때문에 침략하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부여가 멸망할 즈음인 6세기 중반 무렵에 유민들이 두막루국을 세웠다. 대막루, 대막로, 달말루라고도 쓰여진 오랫동안 존속한 큰 나라이다. 그런데 '위서'의 두막루전에 "두막루국은 ~옛날의 북부여다(舊北夫餘也)라며 부여인들의 기질을 거의 똑같게 기록했다. 중국인들이 그것도 정사에서 주변의 이민족들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한 예는 아주 드문 일이다. 부여를 그 시대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다 그렇게 평가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기질을 가진 부여인들은 말(名馬)을 잘 탔고, 활을 잘 쐈다. '삼국사기'에 주몽은 부여의 속어로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기록했다. 추모(주몽)는 북부여의 천제인 해모수의 아들이다. 동아시아 고대문화의 주역이면서 우리와 문화적으로 종족적으로 가까운 동이(東夷)의 '이(夷)'라는 글자는 큰활을 뜻하기도 한다. 5월 말에 국제실크로드 학술회의 때문에 태원을 방문했다. 고구려의 모본왕이 AD 49년에 1천km 이상 달려 공격했던 곳이다. 부여나 고구려 등은 말 타고 달렸고, 유목민족들의 활과 구조가 같은 예맥의 활을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부여인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나? 그럼 부여인들은 어떤 음식들을 즐겨 먹었고, 조선시대 등의 음식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음식은 자체가 사람과 사회의 기질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먹거리를 구하는 일 자체가 사회전체의 시스템, 즉 산업, 신앙 등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7천년 전의 유적지인 요녕성의 심양의 신락(新樂) 유적에서 콩의 화분이 발견됐다. 또 두막루, 발해의 수도권이었던 흑룡강성의 영안현, 길림성의 연길현에서 발견된 큰 콩은 약 3천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지'에 나타난 '선장양'(善醬釀)이라는 기록처럼 고구려인들은 발효 기술이 뛰어나 메주를 만들었다. 묘주가 진(鎭)인 평양 근처인 덕흥리의 고구려 고분의 벽화 묵서에는 "...아침에 먹을 鹽豉(소금과 메주)를 충분히 마련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부여인들이 콩을 발효시켜 메주(豉)를 담그고 된장(청국장)을 만들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기술이 훗날 일본으로 건너가 낫토(納豆)를 만들게 한 것이다. 그럼 부여인들은 조선 시대처럼 곡식과 채소 등 농작물만 먹었을까? 700년 어쩌면 더 이상일지도 모르게 존재한 부여는 중핵 지역인 송화강 수계망 유역과 주변의 분지 지대가 온화하고, 완만한 평야와 초지, 산지대가 혼합된 생태공간이었다. 거기에 흥안령 등의 크고 두터운 산록들, 동만주의 거대한 숲과 강도 '생활권'(living zone)이었다. 때문에 농경과 사냥, 목축, 심지어는 어업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다중 생활권' 속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고구려 고분 벽화와 기록들에서 보이듯 동물들을 사냥해서 육식도 즐겼고, 과일과 버섯 약초, 꿀, 산삼을 생산했다. 서북만주 지역에서는 축산업이 발달했으니 필시 요구르트도 만들어 먹기도 하고, 화장품으로도 애용했을 것이다. 인류는 강가와 해안가의 어렵으로 문화가 시작됐다(물가 문화설)고 한다. 부여의 생활권이었던 만주의 곳곳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어업 유적들이 발견됐으니 부여인들은 강어업이 성행했다. 거기에다 동부여 등은 동해로 이어졌으니 훗날 동예처럼 바다 생선도 먹었을 것이다. 이러한 식품환경이라면 부여의 귀족들은 부침개 종류도 만들어 먹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여인들의 의상은? 우리와 달리 만주 지역에서 살았던 부여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 한국인들은 조선시대를 다룬 엉터리 사극을 보면서, 또 문익점의 목화씨 밀수(?) 때문에 우리는 옷조차 제대로 못 입었던 민족으로 오해를 했다. 물론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삼국지'의 오환·선비전에는 부여인들이 "백색의 옷을 숭상하고 상중에는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었다(居喪, 男女皆純白)." 또 "흰옷을 숭상하여 흰 삼베(白布)로 만든 소매가 큰 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고 썼다. 실은 (동)예 또는 예맥도 삼베가 산출되며 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통일신라는 유명한 비단 수출국이었다. 중국학자들은 부여의 핵심영토였던 길림 지역을 '천잠 문화권' 즉 가장 좋은 비단이 생산되는 문화권이라고 불렀다.(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부여의 귀족층들은 금, 은으로 모자와 옷을 장식하였는데, 금이 많이 생산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구려는 금 수출국으로 유명했는데, 기록에 보이듯 그 대부분은 부여 지역에서 생산한 것이다. '삼국지' 등에도 부여에서는 붉은 옥(루비 계통)이 나고, 큰구슬은 크기가 대추만 하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길림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돌상자 무덤에서 '백석관'이라는 연옥 제품이 나왔다. 뿐만 아니라 추위 탓도 있지만 값비싼 모피옷도 즐겨 입었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부여전에는 여우·삵괭이·원숭이·담비가죽·살괭이 등이 생산됐다고 기록했다. 지금도 숲이 발달해서 온갖 동물들이 서식한다. 현지의 박물관에 들어가면 앞 방부터 온갖 동물들을 박제로 재현해 놓았을 정도이다. 모피는, 특히 동만주와 연해주의 담비가죽은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도 유라시아 세계에 엄청난 고가로 팔린 무역상품이었다. 그래서 조선, 부여, 고구려는 물론이지만 훗날 발해는 일본에서 무역역조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모피를 대량 수출했다. 이러한 풍속과 수출은 재료도 좋지만 공예산업이 발달한 때문이다. ◆부여인들이 즐겨한 놀이? 신앙? 부여인들은 어떠한 놀이들을, 어느 정도로 즐겼을까? 고대 사회에서 놀이들은 사냥이나 농사, 어업 등의 생산행위와 직결됐지만, 한편으로는 신앙과 연결됐다. 사상이나 철학, 종교, 조직적인 교육기관이 부족한 고대 세계에서 신앙이란 단순한 종교행위를 넘어 인간과 종족의 탄생, 국가의 건국, 집단의 가치관 등을 교육시키는 '전범'(charter)이고, 윤리를 함께 실습하는 공동체 '의례'(ritual)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조상과 해, 달, 별, 하늘과 더불어 각종 신들을 모셨다. 특히 해신인 고등신(추모)과 물 또는 동굴(穴)로 상징되는 부여신(유화부인)이 양대 축을 이루었다. 중국의 『위서』 고구려에는 요동성이 당나라의 군대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놓이자 부여신을 상징하는 소상(인형)이 사흘 동안이나 피눈물을 흘렸다고 썼다. 또 고구려 궁성에는 부여신을 모신 사당이 있고, 사당 안에는 나무로 만든 부인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추모는 해모수의 아들이고, 유화부인은 해모수의 부인이고, 동부여의 태후였다. 결국 부여의 신앙을 계승한 것이다. 우리는 태양을 '해'라고 부른다. 북부여의 천제인 해모수는 '해'(太陽)와 '모시'(池)에서 기원한 조화된 이름이다(이병도). 해모수의 자식은 해부루(解扶婁)이다. 동명(東明)은 빛과 관계가 깊다. 이처럼 부여, 고구려를 위시한 예맥족은 해를 신령스럽게 여겼고, 고구려도 전기의 왕들은 '해'(解)로 성으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환웅, 고구려와 신라 등의 임금들 명칭, '조선', '부여', '한국' 등의 국호, 태백산 백두산 등의 산 이름, 그리고 강과 언덕, 마을의 이름에는 해와 연관된 것들이 매우 많다. 그 근원에 부여가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유화부인을 모신 신모신앙은 조선 후기까지 평양지역에 남아있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신앙심을 갖고 살아가던 부여인들이기에 죽음 또한 독특하게 받아들여 장례문화가 유별났다. 『삼국지』에는 부여인들은 장례를 무조건 5월에 치렀는데, 만일 다른 달에 죽으면 5월까지 시신을 보존했고, 얼음을 사용해서라도 시신이 부패되는 것을 늦추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록을 5개월 동안 장례를 치른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순장의 풍습이 있어서 "~순장(殉葬)시키는데, 많을 때는 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러한 장례풍습은 유라시아 뮤목민들의 장례풍습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부여인들은 독특한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면서도, 장례를 치루면서도 즐겁게 놀이를 했다. '후한서'에는 부여가 "섣달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매일 큰 모임을 가져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논다. 이것을 '영고'(迎鼓)라고 한다." 또 '삼국지'에도 "밤낮없이 길에 사람이 다니며, 노래하기를 좋아하여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行人無晝夜, 好歌吟, 音聲不絶)"고도 기록했다. 이렇게 놀이를 좋아하는 부여인들의 기질이 고구려, 신라 등을 거쳐 지금 한류로 계승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여인들의 기질이 있다. 고구려인들도 가졌던,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진 '자유의지'(free will)이다. 부여는 조선처럼 생태환경이 단순하고, 생태경계가 고정된 국경선의 국가가 아니다. 만주라는 다변화된 생태 환경 속에서 다양한 산업과 문화를 자율적으로 발전시켰고, 순환적으로 생활권을 확장하는 역사유기체로서 존재했다. 잊혀진 나라, 잃어버린 땅의 역사인 부여는 복원이 필요한 기억의 공간이며, 현재 한민족의 정신 세계와 유전적 기질과 연관된 내면의 유산이다. 그리고 그 유산은 고구려에게 전달됐다. 역사학자·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2025-06-30 09:36:09
(사)해병대전우회 대구시연합회 환경정화 캠페인 및 봉사활동
(사)해병대전우회 대구시연합회(회장 장세명)는 지난 29일 대구시 북구 노곡동 하중도에서 100명의 해병전우회 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환경정화 캠페인 운동과 금호강 수중정화 작업을 했다. 이날 손인호(매일탑리더스아카데미 17기) 연합회 상임부회장과 회원들은 버려진 비닐, 깡통, 유리병, 스치로폼 등 각종 쓰레기들을 수거했으며, 일부 회원들은 금호강 수중정화 작업을 실시했다.
2025-06-30 09:27:20
◆대구 달성군(7월 1일자) 〈4급 승진〉 ▷경제환경국장 백두현 ▷문화관광국장 최태식 ▷다사읍장 권성열 〈4급 전보〉 ▷행정국장 표준식 ▷주민복지국장 신인식 ▷의회사무국장(파견) 김진천 ▷총무과(파견복귀) 윤종민 〈5급 승진〉 ▷교통지도과장 권성희 ▷화원읍장 최수정 ▷논공읍장 주강숙 ▷다사읍 지역개발과장 곽진호 ▷관광과장(직대) 황은수 ▷유가읍장(직대) 김성진 ▷현풍읍장(직대) 최성진 〈5급 전보〉 ▷홍보협력과장 김수정 ▷총무과장 조양래 ▷청소자원과장 김태경 ▷장애인복지과장 이재천 ▷위생과장 나태연 ▷안전총괄과장 김철훈 ▷문화예술과장 손계영 ▷옥포읍장 나호영 ▷가족정책과장 김숙향 ▷총무과(파견복귀) 나태연
2025-06-26 17:00:00
책과 상상이 자라는 숲, '달성어린이숲도서관' 7월 1일 임시 개관
대구 달성군이 어린이 특화 도서관으로 건립한 '달성어린이숲도서관'이 내달 1일 임시 개관한다. 정식 개관은 7월 24일이다. 달성군 현풍읍에 위치한 달성어린이숲도서관은 지상 3층 규모로 조성된 군 최초의 어린이 특화 도서관이다. 건물은 층별로 독창적인 테마를 중심으로 구성돼 아이들이 책을 통해 상상하고, 체험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1층 '키움숲'은 영어 키즈체험실, 가족열람실, 요정들의 오두막, 요정들의 숲 등으로 꾸며져 영유아와 보호자가 함께 책과 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2층 '틔움숲'은 모험가의 성, 숲열람실, 해리포터방, 고요의 방 등 아이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서 중심 공간으로 구성됐다. 3층 '채움숲'은 가상체험실, ICT 아트플레이, 휴게데크, 강좌실 등을 통해 창의적 사고와 감각적 체험이 동시에 이뤄지는 창작형 학습 공간이다. 도서관 내부는 친환경 소재를 활용한 자연친화적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으며,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테마 공간과 다양한 도서, 체험 중심의 프로그램을 통해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기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도서관은 화요일부터 금요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토요일과 일요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된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도서 대출 및 반납, 회원가입 등의 서비스는 정식 개관 이후 8월부터 시작될 예정이며, 프로그램 운영은 안전을 고려해 사전 신청제로 진행된다. 최재훈 달성군수는 "달성어린이숲도서관은 아이 키우기 좋은 맞춤형 교육도시 달성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소중한 결실이다. 단순히 책 읽는 공간을 넘어, 아이와 부모 모두가 행복한 꿈과 추억을 키울 수 있는 특별한 도서관"이라며 "다양한 독서활동 프로그램을 통해 상상력과 창의력이 자라나는 문화놀이터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2025-06-26 10:25:29
'세대 넘어 전한 존경과 감사'…대구 달성군, 6·25전쟁 기념행사 개최
대구 달성군은 24일 현풍읍 달성군민체육관 1층 다목적강당에서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 최재훈 달성군수, 김은영 군의회의장을 비롯해 보훈단체장과 참전유공자 등 약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6·25전쟁 제75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이날 행사는 6·25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한 뜻 깊은 자리로 마련됐다. 특히 포산초등학교 '달그린봉사단' 어린이 11명이 참전유공자에게 정성껏 준비한 코사지와 감사 손편지를 전달한 장면이 이날 행사의 백미였다. 아이들의 손글씨가 담긴 편지를 받아든 유공자들은 고마움과 감동으로 조용히 미소 지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추경호 의원은 이날 축사를 통해 "오늘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가능케 한 그 숭고한 헌신을 결코 잊지 않겠다"면서 "보훈은 과거에 대한 예우일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책임이다. 진심 어린 존경과 관심이 이어질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최재훈 달성군수는 "영웅들이 지켜낸 이 나라의 자유와 평화가 오늘의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야 한다"며 "'영웅들이 지킨 나라, 이어나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보훈부의 슬로건처럼, 달성군은 일상 속 보훈 문화 정착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2025-06-24 15:27:59
대구 달성군의회(의장 김은영)는 23일 6·25전쟁 제75주년을 맞아 달성군 논공읍에 위치한 6·25참전용사 기념비를 찾아 참배하고, 호국영령과 참전 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나라를 위한 공헌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은영 의장을 비롯해 달성군의회 의원 12명 전원이 참석했으며, 헌화와 묵념을 통해 호국 영령의 넋을 기리고,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김은영 의장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신 참전용사 한 분 한 분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며 "달성군의회는 보훈의 가치를 잊지 않고, 자유와 평화의 정신이 지역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2025-06-24 15:21:53
김은영 대구 달성군의회 의장,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일명예지사장 위촉
김은영 대구 달성군의회 의장이 23일 국민건강보험공단 달성고령지사 '일일명예지사장'으로 위촉, 공공기관의 주요 업무를 직접 체험하고 지역 사회와의 소통을 강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행사는 국민건강보험공단 달성고령지사가 지역 주요 인사를 대상으로 공단 제도의 우수성을 소개하고, 공공서비스 운영 현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했다. 김 의장은 이날 위촉장 수여식을 시작으로 주요 사업에 대한 업무 보고를 받고, 공단 업무 및 민원 현장 체험, 여성 팀장들과의 간담회 등 다양한 일정을 소화했다. 김 의장은 "국민건강보험은 군민의 일상과 가장 밀접한 제도 중 하나로, 이날 체험을 통해 그 무게와 책임을 다시금 느꼈다"며 "앞으로도 군민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펼치기 위해 현장 중심의 의정활동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2025-06-23 15:39:32
대구 달성군은 '전시회 참가비 지원'(국내, 해외) 참여 기업을 내달 11일까지 추가 모집한다고 23일 밝혔다. 달성군은 2021년부터 지역 중소 제조기업을 대상으로 '전시회 참가비 지원사업'을 추진, 중소기업의 제품 홍보 및 판로 개척을 지원하는 등 기업들의 큰 호응을 얻어왔다. 올해 사업예산은 전년 대비 4천만원 증액된 6천만원이다. 또한 대구 기초자치단체 최초로 해외 전시회 지원이 추가돼, 지역 기업이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원 대상은 달성군 내 중소 제조기업으로, 전국에서 열리는 전시회 및 박람회 부스 임차료를 기업당 국내 최대 200만원, 해외 전시의 경우 500만원까지 지원한다. 최재훈 달성군수는 "지역 중소 제조기업에 우수한 상품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앞으로도 기업의 경쟁력이 향상되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모집과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달성군청 홈페이지(www.dalseong.daegu.kr) '고시/공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25-06-23 13:57:40
[김수지의 조선후기 당쟁사] 나주벽서 사건과 토역정시 사건, 소론 멸종 광기의 대토벌
◆대리청정 샌드위치 세자 영조 25년(1749)에 15세의 세자에게 맡겨진 업무는 오늘날로 치면 사법, 국방, 인사에 관한 업무는 제외하고 일상적인 행정 업무만 대리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매일 올라오는 탕평을 반대하는 상소를 처리했다. 15세 세자가 당쟁에 관련한 상소문 지뢰밭에 아버지 대신 들어간 것이다. 영조는 세자에게 당쟁 관련 상소문 처리를 맡기고, 그와 관련한 상소가 본인에게 까지 올라오지 못하게 차단했다. 대리하는 세자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편법이었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영조가 몰입했던 일은 군역(軍役)의 혼란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흘러갔지만 그래도 불공정한 군역을 재정비하여 균역법을 선포한 것은 영조 28년(1752)이었다. 이것은 그나마 세자에게 당쟁 상소를 맡기고 영조가 집중적으로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영조는 노론내 반탕평파들의 지속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론중용 탕평책을 그만할 마음이 없었다. 한 발 더 나아가 세자가 그들의 집요한 반대 상소를 단호하게 제압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런 기대 자체가 모순이었다. 단지 일반 정무를 대리할 뿐인 세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에게 상소를 돌려주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급기야 영조 27년(1751) 6월 12일에 영조는 세자를 격하게 나무랐다. 옆에서 보고 있던 영의정 김재로가 "동궁 저하께서 어린 나이에 대리하여 ..일찍이 성상의 뜻을 우러러 몸 받지 않음이 없으셔서 신이 일찍이 찬탄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매양 지나치게 책망을 하십니까.." 라고 말할 정도 였다. 영조는 자신이 수십년에 걸쳐 당론 중재에 애를 썼지만 완벽하게 해내지 못했던 일을 갓 대리청정을 시작한 10대 중반의 세자가 완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엉뚱한 망상에 사로잡혀 세자를 사사건건 괴롭히고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모순된 행동인지 주변 신하들의 눈에는 다 보였지만 오로지 영조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노론반탕평파들은'소론을 완전하게 숙청하도록 아버지에게 간언하지 못하는 아들은 불효자'라는 논리로 끝도 없이 상소를 올리면서 세자를 흔들었다. 아버지 영조는 그들을 엄하게 제압하지 못한다고 하루가 멀다 하게 세자를 꾸짖었다. 여기서 부자간의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기 권력인 세자가 아버지 영조를 뒤이어 소론중용 탕평책 까지 이어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노론 반탕평파들은 부자 간의 틈이 더욱 벌어지도록 맹렬하게 활동했다. 세자는 아버지 영조와 노론반탕평파들 사이 에서 양쪽으로부터 두들겨 맞는 샌드위치 신세였다. ◆나주벽서 사건과 토역정시 사건 - 광기의 대토벌 죽음의 행렬 그런 시절이 흐르던 중, 영조 31년 을해년에 전국의 소론들을 멸종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영조 4년에 있었던 무신란과 관련하여 귀양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던 소론들이 역모로 얽혀 대토벌이 되는 사건이다. 을해옥사로 불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결국 소론 중용 탕평책을 중지하게 된다. 영조 31년(1755, 을해)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가 급하게 장계를 올렸다.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는 흉서가 나주 객사에 내걸렸다는 보고였다. 무신란이 있기 전 영조 3년에 괘서가 유행처럼 나붙은 이후, 이런 비슷한 괘서가 영조 24년에 걸린 적이 있었다. 당시 남인 이지서 등을 잡아들이고 사건을 일단락 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7년만에 다시 등장한 괘서였다. "기한을 정해 반드시 범인을 잡아오라."는 명이 떨어졌다. 영조의 명의 떨어진 지 1주일 뒤인 2월 11일, 나주에 살고 있는 윤지(尹志)가 체포됐다. 윤지는 윤취상(尹就商)의 아들이다. 윤취상은 김일경과 함께 노론 축출에 앞장섰던 소론 강경파였다. 그 윤취상의 아들 윤지는 무신란에 연루되어 제주에서 10년, 나주에서 20년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영조와 조정은 나주 벽서 사건의 범인을 30년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윤지 라고 지목한 것이다. 윤지의 두 아들 윤광철(尹光哲)과 윤희철(尹希哲)이 잡혀왔고, 윤지와 절친이었던 전직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도 잡혔다. 영조는 이들을 친국했다. 관련자들이 늘어났다. 윤지가 유배 생활 내내 훈장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기 때문에, 윤지에게 글을 배워 나주 관아에서 일을 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주 외에 나주와 가까운 지역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몰락한 양반들도 윤지와 자주 어울렸다. 이들이 모두 역모 사건으로 엮어지기 시작했다. 이하징은 2월 23일에 복주되었고, 윤지는 끝내 자백하지 않은채 물고되었다. 윤지의 아들 윤광철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당일 영조는 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현장인 숭례문으로 친히 거동했다. 윤광철의 온 몸이 산채로 찢겨졌다. 비명과 함께 찢겨진 사지에서 피가 솟구쳤다. 모두 눈길을 돌리지 말고 그 모습을 똑똑히 쳐댜봐야했다. 눈길을 돌리면 죄인을 동정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월 11일부터 3월 30일까지 약 40일 동안 33명이 효수당했고 20명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이것은 광기어린 복수극에 가까웠다. 점점 잔혹해져가는 영조의 복수극에 보다 못한 노론 탕평파 영중추부사 김재로가 "지금은 군사를 일으키는 때가 아닌데 날마다 효시하는 것은 불가할 듯 합니다."라고 말릴 정도였다. 한 달 넘게 진행한 대역모 죄인들을 처벌을 마무리 할 때가 되자, 영조는 역적 토역을 기념하고 축하한다는 의미로 5월 2일 토역정시(討逆庭試)를 개최했다. 토역정시는 역모 사건을 마무리하고 다시 일상적 정무를 회복하기 위한 터닝 포인트로서의 역할도 있었다. 그런데 마무리는커녕 이 토역정시에서 죽음의 행렬은 다시 시작되었다. 시험 답안지 중에 조정을 비난하는 내용과 역대 임금의 휘(諱)를 깨알 같은 글씨로 적은 답안지가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휘란 선왕들의 이름이다. '꺼리다'라는 뜻인데 왕조 국가에서는 임금들의 이름을 절대 쓸 수 없었다. 그런데 휘를 잔뜩 써놨으니 누군가 죽기를 작정하고 써낸 것이었다. 곧 바로 심정연(沈鼎衍)이 지목되어 끌려 나왔다. 심정연은 영조 4년 무신란에 연루되어 아버지와 형을 잃었다. 당시 그는 2세 였기 때문에 화를 면했다. 그 후로 27년이 흘러 29살이 되어 복수의 마음을 먹고 토역정시장에 신분을 속이고 들어왔던 것이다. 수사가 시작되었다. 심정연의 배후에 윤혜(尹惠)가 있음이 밝혀졌다. 윤혜는 윤취상의 동생이자 윤지의 숙부였다. 윤혜는 답안지에 왜 휘를 가득적었냐는 질문에 "제 아들의 이름을 적을 때 상고하려고 적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영조는 기가 막혔다. 죽일테면 죽여라 하는 대답이었다. 너 같은 사람도 임금이 되는데 내 아들이라고 임금 되지 말란 법 있느냐는 이죽거림이었다. 영조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관련자로 5월 20일에 승지(承旨)로 있던 신치운(申致雲)이 잡혀왔다. 신치운은 잡혀와서 폭탄발언을 했다. "나는 갑진년(영조 즉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말이었다. 영조는 자신이 형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만방에 보이기 위해 자신이 평생 노력해 오며 탕평을 추구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세월이 허사였구나 하는 좌절과 분노에 휩싸였다. 5월 6일에 윤혜를 복주하면서 영조는 술에 취했다. 영조는 평소에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날 만취했다. 윤혜의 목을 치고 그 목을 깃대 끝에 매달도록했다. 백관들을 모두 나오게 한 후 머리가 달린 깃대를 조리돌리게 했다. 광기의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다. 영조 31년(1755) 2월의 나주벽서 사건과 5월의 토역정시 사건을 '을해옥사' 라고 한다. 이 옥사로 참수당한 자가 200여명, 노비가 되거나 귀양간 자가 300여 명으로 모두 500여 명이 화를 입었다. 탕평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살육의 당쟁을 막고자 했지만, 영조의 조선은 피바다에 잠기고 있었다. 그것은 친소론 정서로 성장하여 노론 반탕평파의 상소를 막고 있었던 세자의 피를 부르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25-06-23 09:47:29
'헛'은 인간의 욕망이 개입된 빔이라 할 수 있다. 채움보다 비움, 그건 힘이 아니라 일종의 세월(歲月)의 내공이랄 수 있다. 하지만 비움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바닥을 핥은 뒤에야 꿈꿀 수 있는 거룩한 대지(大地)라 할 수 있다. 숱한 밥이 있다. 그런데 경상도에는 타 도시에선 발견할 수 없는 흥미로운 밥이 있다. 바로 '헛제삿밥'이다. 그 밥은 지난 시절 가난한 유생들의 애환이 스며 들어가 있다. ◆헛제삿밥 기원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깊은 밤까지 공부하다 출출해지면 제사음식을 차려 놓고 축과 제문을 지어 풍류를 즐기며 허투루 제사를 지낸 뒤 먹던 음식이 바로 헛제삿밥이라 한다. 1925년 최홍년(崔汞年)이 지은 '해동죽지'(海東竹枝)에 '우리나라에서는 제사를 지낸 음식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제삿밥을 먹지 못하므로 제사음식과 같은 재료를 마련하여 비빔밥을 먹는데 이것을 헛제삿밥이라 한다'란 구절이 나온다. 제사 음식에는 마늘, 파,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는다. 불교계 사찰음식에도 '오신채'(五辛菜)라 해서 마늘, 부추, 파, 달래, 흥거 등 자극성이 강한 다섯 가지 양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걸 날것으로 먹으면 화를 잘 내게 하여 수행을 방해한다. 또한 음란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불가에서는 금기시 한다. 기제사, 솔직히 민초에겐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설렘의 시간'이다. 자시(子時·밤 11시~오전 1시)에 나타나는 조상신은 음식에서 풍겨나는 향기에만 응감한다. 냄새가 귀신들의 주식이다. 그런데 산자들이 좋아하는 고춧가루, 마늘, 파 등 자극성 강한 양념이 가해지면 귀신들이 먹질 못한다고 선조들은 믿었다. 기본적인 상차림으로 3적(육적, 어적, 소적(두부적)), 봉적(닭찜)과 3탕(명태, 건홍합, 피문어), 3색 나물(숙주, 고사리, 시금치), 문어숙회, 김치, 상어 돔배기, 밥, 국 등이 올라간다. 제사상이 그렇듯 나물 가짓수도 반드시 홀수여야 하고 한번 무치고 나면 절대로 다시 무침 하지 않았으며 간장 깨소금 참기름 외에 다른 조미료를 넣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고춧가루가 들어간 찬은 내놓지 않는 데 비해 헛제삿밥에는 예외적으로 배추김치라든가 고춧가루가 들어간 찬이 올려진다. 현재 헛제삿밥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세 도시가 있다. 안동, 진주, 그리고 대구 정도이다. ◆안동 헛제삿밥 안동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또한 헛제삿밥의 고장이다. 당연히 제사문화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 핵이랄 수 있는 '불천위 제사'. 그 대상자가 무려 49명. '국불천위'(國不遷位)란 가문 최고의 영광이다. 충현의 학풍과 인품을 후대에 기리기 위해 국가가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로 한 성스러운 위패이다. 아무튼, 안동에서 가장 먼저 헛제삿밥을 상품으로 개발한 사람은 누굴까? 바로 작고한 조계행 할머니다. 조 할머니는 1978년 안동댐 입구에 있는 안동민속촌 안에서 '안동 민속음식의 집'을 열었다. 거기서 헛제삿밥을 전국에서 처음 상품으로 선보인 것이다. 초창기엔 웃지 못할 일이 비일비재했다. 제사문화에 문외한인 일부 외지 관광객들은 그게 기제사 때 음복하는 제삿밥인줄 모르고 그냥 '안동 비빔밥'으로 생각해 고추장을 찾았다. 조 할머니는 그게 그냥 비빔밥이 아니고 헛제삿밥이란 사실을 알려준 뒤 그 음식에는 고추장을 넣으면 안 되고 '지렁'(국간장)을 넣어야 법식에 맞고 맛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장사가 잘되자 그 이듬해 '까치구멍집'이 생겨나면서 이후 5개 업소가 집단으로 몰린다. 초창기에는 메뉴가 간단했다. 밥·나물·제기·탕·간장·전이 전부였다. 하지만 상에 올라간 간고등어와 상어 돔배기는 관광객들에게 강하게 어필된다. 또한 후식으로 나온 생강과 고춧가루 냄새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안동식혜도 입소문이 난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곁반찬이 너무 적다는 관광객들의 지적 때문에 조기, 멧국수, 물김치 등 추가 메뉴가 생긴다. 안동 민속의 집은 그 이후 하회탈춤의 백정 역할로 인간문화재가 된 이상호·방옥선 부부에게로 넘어간다. 조 할머니는 94년쯤 식당을 아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하회마을 입구 탈박물관 건너편에 '옥류정'을 열지만 이것도 2002년 타인에게 넘어간다. 까치구멍집은 최근에 타계한 손차행 할머니한테서 며느리 서정애한테 가업이 이어졌다. 안동민속촌 내 헛제삿밥촌은 감사원으로부터 철거명령을 받는다. 그곳이 문화재 보호구역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쯤 안동 민속의 집과 까치구멍집이 함께 현재 자리로 이전한다. 현재 안동에서 헛제삿밥만 전문적으로 내놓는 식당은 월령교 앞 두 곳, 그리고 하회마을 하회식당과 청기와 식당 정도이다. ◆안동의 조리법 안동 헛제삿밥은 밥 옆에 나물이 이웃하고 그 앞에 탕(湯)·전(煎)·적(炙)이 세트를 이룬다. 산적에 간고등어와 상어 돔배기가 들어가는 게 특이하다. 탕 재료는 육·해·공에서 다 나온다. 어탕(어물로 끓인 것)·육탕(소고기로 끓인 것)·채탕(채소 위주로 끓인 것), 이 삼탕이 섞인 막탕이 된다. 헛제삿밥을 먹을 때는 나물에 고추장을 넣지 않고 깨소금, 간장으로 간을 해 비벼 먹는다. 나물은 무, 콩나물, 고사리, 도라지, 숙주나물(일명 묵나물) 등 5채를 사용한다. 놋그릇에 올려지는 먹거리 구성도 흥미롭다. 배추·다시마·동태전, 호박부침개, 소고기 산적, 간고등어, 상어 돔배기, 삶은 계란 등 9가지가 올려진다. ◆진주 헛제삿밥 진주는 광복 이후 서너 곳이 영업했는데 60년대에 자취를 감춘다. 현재 금산면 갈전리 '진주헛제삿밥'이 유일하다. 초대 여사장 이명덕은 합천 출신인 친정 어머니(이달순)가 봉래동에서 음식을 팔 때 잠시 헛제삿밥(1982년 진주시청 근처 '강나루 헛제사밥' 오픈)을 취급했지만 찾는 이가 별로 없어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지금 자리로 이전해왔다. 현재 아들 내외(김창우·양은영)가 가업을 이었다. 2000년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의 권유로 헛제삿밥 전문점 시대를 연다. 이 무렵 안동시는 안동 헛제삿밥을 진주비빔밥처럼, 그리고 진주시청은 헛제삿밥과 냉면을 특화한다. 김 소장은 당시 부산방송(PBS)을 통해 진주 헛제삿밥을 재현해 반향을 일으킨다. 이명덕은 이후 〈사〉대한명인협회로부터 '진주 헛제삿밥 명인'으로 선정된다. 현재 이명덕은 아들 내외(김창우·양은영)와 함께 일을 한다. 초창기에는 주방에서 요리할 때 제사 분위기를 위해 향불을 켜기도 했다. 이젠 세상이 달라져 향 냄새를 꺼리는 손님도 있고 해서 향은 치웠다. 진주 헛제삿밥은 안동 헛제삿밥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일단 비늘이 없는 돔배기와 간고등어는 사용하지 않는 사실이다. 여긴 조기, 민어, 돔 등이 메인 생선이다. 안동에서 즐겨 보이는 배추전과 명태전도 여기선 보이지 않는다. 안동권에서는 나물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내지만 진주에선 나물에 칼질하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보통 비빔밥은 젓가락을 사용해 비비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진주 헛제삿밥은 숟가락으로 비빌 것을 주문한다. 이곳 나물 그릇에는 안동보다 2가지가 더 들어간다. 숙주나물과 미역이다. 탕국도 안동식보다 더 복잡하게 들어간다. 마른 문어·홍합·새우·명태를 비롯해 오징어, 조갯살, 두부, 무, 표고버섯, 죽순, 닭뼈 육수 등 무려 13가지가 들어간다. 토막 낸 두부와 무의 크기도 안동의 4분의 1 정도. 전체적으로 진주 헛제삿밥은 안동식보다 더 푸짐하다. 6가지 모둠전(육전, 어전, 버섯전, 부추전, 산적 등), 그리고 마지막엔 생선찌개 같은 일명 '진주식 거지탕'이 특식으로 나온다. 조기 등 말려 놓은 갖은 생선을 넣고 신선로처럼 푹 끓여낸 것이다. ◆대구 헛제삿밥의 차림 구한말까지 대구 헛제삿밥이 유명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는 뭘까? 대구‧경북의 제례 음식문화부터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대구의 헛제삿밥에는 조기가 올라가고, 청어 철에는 청어가 올라가지만 반드시 올리는 게 '상어 돔배기'다. 지금도 경상도 사람들은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나 잔칫날, 그리고 명절과 제사 때에는 꼭 돔배기를 상에 올린다. 특히 대구의 제사상에 올리는 돔배기를 만드는 상어는 '양지'라 해서 귀상어를 제일로 친다. 돔배기를 쪄 올리기도 하지만 보통 돔배기 산적으로 만들어 올리기도 한다. 돔배기 산적도 모양에 따라 '바대산적'과 '써래산적'이 있다. 아이 손바닥에서 어른 손바닥 크기로 형편에 따라 썬 돔배기를 세 개에서 다섯 개씩 꼬챙이에 나란히 꿴 '바대산적'은 일반적인 제사상에 올린다. 써래산적은 조상의 묘를 찾아 가 지내는 묘제 때 올린다. 써래산적은 폭 5㎝, 길이 25㎝ 정도로 길게 썬 돔배기를 각각 하나씩 꼬챙이에 꿴 것이다. 2022년 전통식문화 연구가인 김영복, 그리고 힐링푸드 연구가인 김영은 씨가 대구시 남구 이천동 한 너와집에서 대구식 헛제삿밥을 재현했을 때 필자도 맛을 봤다. 상어돔배기, 조기, 삼색나물, 두부전, 소고기산적, 백김치, 식혜, 지렁 등이 상에 올랐다. wind3099@hanmail.net
2025-06-20 0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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