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에서 전쟁이 더 이상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산업과 경제 측면에서 전쟁은 비효율적이며, 인류는 전쟁의 시대를 지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이란의 충돌은 이러한 전망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음을 드러낸다. 전쟁은 여전히 지정학적 우위, 자원 확보, 이념적 지배를 위한 전략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하라리의 이상은 유의미하지만, 실제 세계는 아직도 힘의 논리로 움직인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갈등을 지켜보며, 문득 예전에 방문했던 마사다 요새와 야드 바셈 기념관이 떠올랐다. 이스라엘에서는 초등학교 입학 전, 군 입대 전, 결혼 전 반드시 이 두 곳을 방문한다. 유대 사막 절벽 위에 세워진 마사다는 2000년 전 로마군에 끝까지 항거하다가,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자유인으로 죽음을 택한 960명의 유대 저항군의 마지막 거점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외친다. "마사다를 기억하라."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 기념관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장소다. 기념관의 이름은 이사야 56장 5절에서 따왔다. 후손 없이 사라진 자들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 영원히 새기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기억'에 기반한다. 그들은 상처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기억함으로써 비극의 재발을 막는다. 상처를 통과한 기억은 민족의 근육이 되지만, 때로는 폭력을 부르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영화 『드래곤 길들이기』의 배경인 바이킹 마을 '버크' 또한 전통과 싸움의 기억이 지배하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드래곤을 적으로 간주하고 오랜 세월 싸워왔다. 그러나 주인공 히컵은 가장 무서운 드래곤, 투슬리스를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손을 내밀어 친구가 된다. 히컵의 다름은 처음엔 비난받지만, 결국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고 세대의 패러다임을 흔든다. 싸움에서 평화로, 편견에서 공존으로, 그는 새로운 지도자가 된다.
얼마 전 진료실에 두 살 남자아이가 아빠와 외할머니 손을 잡고 들어왔다. 아이는 장난감을 향해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고, 나는 미리 작성된 설문지를 떠올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이 어머니는... 어떻게 되셨나요?" 아빠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세 달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유아 발달 설문지 내용 대부분은 아이의 상태를 짐작해서 적은 것이라는 말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 임만빈 교수의 수필 『아파서 미안합니다』가 떠올랐다. 환자의 통증을 공감하다 아프게 된 의사에게 환자가 전한 한마디. "아파서 미안합니다." 무력함이 배어 있는 그 문장이 오래 남는다. 발달이 늦은 아이들을 보다 보면, 이혼, 산후우울, 극심한 양육 스트레스 등 아이가 아닌 부모가 먼저 치료받아야 할 경우가 많다. 특히 자폐스펙트럼장애가 의심될 때, 가장 큰 회복의 열쇠는 전문가보다 가족의 지지이다. 그러나 그 지지가 병들었거나 부재할 때, 아이는 고립된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전쟁의 비극과 혐오의 고통, 죽음의 절망을 기억하는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가정의 균열, 사회의 편견, 발달지연 아이들의 고요한 외침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히컵이 투슬리스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그 안에 두려움이 아닌 상처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진료실에서 장난감을 향해 손을 뻗는 아이의 움직임 속에서, 엄마를 잃은 상실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진단이나 치료가 아니다. 아이의 회복을 위해, 아빠와 외할머니가 다시 안심하고 웃을 수 있게 하는 일. 그들 안의 '마사다'를 기억하게 해주는 것이다.
마을을 바꾼 히컵처럼, 우리도 한 가정, 한 아이의 세계를 바꿀 수 있다. 조건은 하나. 그 아이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그 아이의 상처와, 그 가족의 눈물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새로운 회복의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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