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변경선을 넘는다는 기내 방송은 없었던 듯하다. 지표를 찾았다. 금융시장이 어지러울 때 행과 열을 맞춘 숫자들은 매트릭스 속에서 자신을 주장했다. 실선의 환율은 날아오르고 점선의 금리는 춤을 추었다. 자료를 움직이기에 비즈니스석도 좁았다. 대한항공은 로스엔젤레스에서 일부 승객을 바꾸어 목적지로 향한다. 회의는 늘 그러하였다. 주제는 오래전 제시되지만 질문은 다급하게 통보된다. 움직임에 대응하는 정책은 항상 바쁘며 준비된 대답은 예상을 벗어난다. 불씨는 미국에서 튀어서 유럽으로 옮겨지고 전 세계로 번지면서 글로벌 위기가 되었다. 소방수는 언제나 대기하지만 신고를 받은 후에야 출동한다. 예상 질문에 집중했거나 피로가 쌓여서 방송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날짜변경선을 넘으면서 오늘은 어제가 되었다. 눈이 감겼다.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에우 쏘우 꼬레아누(Eu sou Coreano). 나는 한국인이다. 외국어대학이 편찬한 포르투갈어 사전은 차라리 얇은 단어장이었다. 그럴 수 있는 시절이었다. 50여 년을 거슬러 강산이 바뀌기 전에는 호랑이가 담배를 폈다. 로스엔젤레스에 기착하면 브라질 항공으로 바꾸어 타야 한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중학교 1학년은 어른이 되었다. 단독 여권이 이민 가방 하나는 책임질 수 있다는 나이를 증명할 때 동생 둘은 어머니 여권에 들어 있었다. 일본어 다음에 영어가 나왔다. 일본항공이었다. 어른이 되려면 어느 나라 말인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어린이들에게는 종이접기 장난감이 제공되었다.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시범을 보였다. 뜯어서 접으면 호랑이와 코끼리 그리고 코뿔소가 되었다. 얼룩말은 풀을 뜯고 사자가 어슬렁거렸다. 꼬리를 활짝 펼친 공작새도 있었던가? 날짜변경선을 넘었다는 증명서가 알파벳 이름과 함께 날짜를 밝히면서 상장처럼 수여되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국제결제은행(BIS) 시장위원회는 매 분기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지만 때로는 대륙을 바꾸면서 개최된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회의 개최자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브라질 차례였는데, 초기 역사의 중심 사우바도르(Salvador)에서 싸웅빠울루(São Paulo)로 변경되었다고 들었다. 주최 측에게는 사정이 있었겠지만 내게는 우연으로 다가왔다. 상파울루를 브라질에서 읽으면 싸웅빠울루가 된다. 인사 발령으로 금융시장국에 돌아왔을 때 익숙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거시경제 변수들이 출렁이는 가운데 외환보유액이 줄어들면서 경고음이 울렸다. 국장이 화재를 진압하기에 바쁠 때 장거리 출장은 부국장의 몫이었다. 현장은 소란스럽고 맥락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런던정경대(LSE)를 방문한 자리에서 "왜 그 누구도 금융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는가?"라고 하문했을 때 저명한 경제학자 누구도 감히 답변할 수 없었다. 이후 서한을 통하여 "여왕 폐하, 미래에 닥칠 상황을 예견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저희는 위험한 부채를 관리할 수 있음은 물론 금융 시스템을 오류 없이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지만, 금융 마법사만 믿은 오만에 빠진 희망 섞인 전망이었을 뿐입니다."라고 사과하는 편지를 보냈다. 위기는 언제나 좋은 일 다음에 발생한다. 어려움이 예상되면 조심하고 대비하면서 대책을 강구한다. 오로지 탐욕과 공포가 시장을 지배할 뿐. 코뿔소는 땅을 흔드는 진동 소리로 달려온다. 세계정책연구소(WPI) 소장 미셸 부커(Michele Wucker)는 훗날 다보스포럼에서 어떠한 위험의 징조가 지속해서 나타나 사전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을 간과하여 온전히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을 회색 코뿔소로 비유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여 엄청난 충격을 주는 검은 백조(black swan)가 아니었다. 검은 흰 새라면 언어의 모순이 아닌가?
그 시절에는 김포공항에서 출발했다. 배웅하던 큰아버지는 울음을 삼키시고 잡지를 보여주셨는데, 이구아수 폭포만 기억난다. 커피 농장과 월드컵 축구 사진도 있었을 터였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젊었던 큰아버지가 폭포를 보여주셨던 뜻은 무엇이었을까? 오랜 세월 생각했으나 다만 그 땅에 존재한다는 사실뿐. 이유 없는 말과 일도 많다는 사실을 나이 들면서 알게 되었다.
노력하면 기회가 반드시 열린다는 지구 반대편으로 이민을 떠나시는 아버지에게도 현지 정보가 거의 없었는데, 돌이켜 보면 개척을 위한 용기일 수도 있었지만 무모함일 수도 있었다. 삶은 계속 그러하였다. 젊은 형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큰 큰아버지를 고향에 남기시고 평양을 떠났다. 유행가에도 나오는 1.4후퇴 때였다. 자유의 길은 길었다. 꽁꽁 언 한강을 걸어서 건너며 대다수 피난민 대열에 합류했지만, 곧 수복되리라는 믿음은 배신이 되었다. 나이 들어 아버지와의 대화가 길어지면 어떤 주제든 6.25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휴전 이후 태어난 나의 시간 간격은 88올림픽 이후 태어난 아들들의 시간 간격과 그리 차이 나지 않았다. 교과서로 배운 전쟁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처럼 다가왔지만, 말씀은 마음이 되었다.
형제는 북한 실향민의 성실과 끈기로 직공으로 시작하여 사업을 세우셨다. 산업이 거의 없던 1950년대였다. 부산 판잣집에서 비롯된 크레파스 공장은 중소기업이 되었으며 힘들었던 계절에 외삼촌과 큰어머니의 친척이 참여했다. 아버지는 제품을 만드는 일과 직공들을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셨고, 큰아버지는 상품을 파는 일과 돈 관리를 담당하셨다. 세월이 흘러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생각했다. 생산관리와 마케팅 그리고 인사관리와 재무관리 중 무엇이 중요했을까? 기술만 있으면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던 가운데 자금은 모자라고 인력은 넘치던 시절이었다. 기술은 시행착오를 통해 현장에서 개발되었다. 그림물감으로 제품을 다각화할 때, 종이 옷을 벗은 플라스틱 색연필은 대세가 되었다. 돌려서 심이 나오는 방식이 눌러서 나오는 방식을 이겼으며, 스프링을 삽입하는 방안은 플라스틱 통 안에 나선형 홈을 파는 방안으로 개량되었다. 그러나 사업이 커지면서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갈등이 싫은 사람은 자리를 피했다.
이민이 결정된 후, 자산 배분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돈을 계산하는 쪽이 유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내켜 하지 않으시는 가운데서도 시작된 절차는 관성의 법칙으로 지속되었다. 큰아버지에게는 유일한 혈육과의 이별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또 하나의 1.4후퇴였다. 부산도 브라질처럼 고향이 아니었다. 지구 대척점으로의 이민은 또 다른 피난이었다. 많은 일은 우연히 결정된다. 늘어나는 인구에 대응하여 정부는 이민을 장려했고 미국에 이어 브라질이 추가되었다. 가족 중 누구라도 포르투갈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시대였다.
인터넷은 두서없이 이렇게 말한다. '한인의 브라질 이민 역사는 1962년 12월 18일 부산항을 떠난 네덜란드 선박 치차렌카(Tjitjalenka) 호가 2개월 가까운 긴 항해 끝에 1963년 2월 12일 브라질 산토스 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선박에는 103명의 한인이 타고 있었다. … 1972년에서 1980년 중에는 파라과이와 볼리비아를 경유지로 삼았던 한인들이 브라질로 대거 이주했다. 이 과정에서 1970년 1월 초를 기준으로 이민자들을 '배 타고 온 세대'와 '비행기 타고 온 세대'로 나누기도 한다. 배를 타고 온 이민자 중에는 북한에 고향을 둔 사람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한국전쟁의 아픈 경험과 고달픈 실향민 생활을 벗어나려고 이민을 택한 것으로 짐작된다. … 브라질 이민사를 몇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 1960년대는 북동부 지역의 농민들이 상파울루와 같은 대도시로 이주하던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조치로 브라질 정부가 1968년 한국 농업 이민을 금지하자, 한국은 1971년 농업 이민이 아닌 기술 이민으로 1,400명을 비행기로 보냈다. 외무부 산하 한국해외개발공사를 통하여 모집된 이들은 서류상으로는 기술 이민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대학 졸업장을 갖춘 고학력의 중산층들이거나 남대문이나 동대문에서 의류업에 종사한 경험이 있던 상인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1971년 7월 17일, 우리 가족은 비행기를 타고 가는 세대의 초기 그룹에 해당되었다.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나라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당시 브라질은 대한민국보다 선진국이었다. 꼬레아를 말하면 남인지, 북인지를 물었다. 일제 시대를 겪은 부모님은 빨간 표지의 포르투갈어-일본어 사전과 노란 표지의 일본어-포르투갈어 사전을 챙겼다.
로스엔젤레스를 거쳐 과룰류스(Guarulhos)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브라질 중앙은행 직원은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 시각 도착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없었기에 홀로 승용차로 가는 길에 붉은 토양의 떼라로사(terra rosa)가 이어졌다. 요즘 서울에도 그 이름을 가진 카페가 문을 열었다. 그때에도 커피나무와 오렌지 나무가 이어졌을 테지. 12시간의 시차를 이기며 눈을 뜨니 기억과 다르지 않은 느낌으로 싸웅빠울루가 다가왔다. 호텔 정문에는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반듯하게 걸려 있었다. 여행용 가방을 풀고 서울에서 보낸 이메일을 서둘러 확인했다. 자료의 추세를 읽으면서 발표 내용을 점검했다. 저녁을 먹고 호텔 주위를 산책했다. 모든 도시의 공기에는 냄새 또는 향기가 있다. 근처 미술관을 스치듯 관람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이 있었을 법도 하였지만, 빠른 걸음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들에 비해 전시품이 적었다는 기억만 있을 뿐. 갑자기 비가 오다가 곧 그쳤다.
김포에서 출발한 가족은 도쿄, 로스엔젤레스 그리고 리마를 거쳐서 깜비나쯔(Campinas)에 도착했다. 마침내 싸웅빠울루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그 많던 가방들을 어떻게 다 옮겼을까? 부산 국제시장에서는 까만 천으로 만든 커다란 이민 가방을 따로 팔고 있었다. 민첩한 아버지를 어머니가 도왔다. 동생들도 보살펴야 했을 것이다. 중학생도 얼마쯤 역할을 하였다. 뒷좌석에 앉은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땅이다." 시차로 인한 졸음으로 눈이 감길 때 아버지는 눈을 크게 떠야 한다고 강조하셨지만, 잠든 동생들은 깨우지 않으셨다. 책임감을 느끼기 딱 알맞은 시간이었다. 햇빛이 강했던 이른 오후였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힘겨운 시간마다 눈을 부릅떴지만, 포기하고 싶은 시간은 너무 길었다. 초청 수수료를 받고 초청장을 발급해 준 장로 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했다. 도착한 날 저녁 식사를 하시던 어른들 옆에서 우리는 밥 대신 바나나와 오렌지를 먹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비쌌던 과일로 배를 채웠다. 오렌지는 라란자(laranja)라고 불렸다.
첫날 시장위원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얼마 전, 미국 연방준비은행과 한국은행이 체결한 통화스왑 계약이 우리나라 외환시장 안정에 도움이 되었기에 한국을 향한 질문은 그나마 우호적이었다. 그래프는 변곡점을 그리고 있었다. 위험은 다가오는 확률의 분포로 나타난다. 준비한 동향 분석을 발표했을 때 참석자들은 코리아를 신뢰했다.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과 오찬과 만찬도 회의의 일부였다. 지난 회의 때 만났던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했다. 기축통화는 주요국 통화와 긴밀히 연결되고 있었다. 슈하스꼬(churrasco)를 먹을 때의 이야기는 다소 가벼웠다. 옆자리의 브라질 중앙은행 직원에게 30여 년 전의 이민을 말했더니 돌아가기 정말 잘했다고 답하며, 오랜 기간 침체를 지속하였던 브라질 경제가 이제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르헨티나 경제를 은근히 폄하했다. 이웃 나라끼리 사이좋기란 언제나 어렵다. 북미에 미국이 있으면 남미에는 브라질이 있다는 대단한 자부심은 외채가 증가하고 빈부 격차가 심화되던 시절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풍부한 자원을 가진 잠재력은 언제나 미래의 땅이다. 코리아의 팻말 뒤에서 긴장을 느끼면서 오후가 지나갔다. 하루 반 일정으로 회의가 진행되니 삼 분의 이를 마친 셈이었다.
만찬 후에 주변을 산책했다. 우려할 만한 치안 문제는 없어 보였다. 외국의 언론은 늘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호텔 근처라서 그럴 수도 있었다. 무엇이든 하루만에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기마경찰이 도심을 순찰했다. 내일 오전 회의를 마치면 공식 일정은 끝나게 된다. 오찬 참석은 각자의 귀국 일정에 따라 생략될 수 있었다. 호텔 프론트에 다음 날 오후에 출발할 수 있는 가이드를 문의했다. 영어-포르투갈어 통역 서비스와 차량을 제공하는 투어 요금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이민 생활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했다. 물론 다른 삶도 그렇지만. 생활과 생계의 차이를 모른다면 아직 어른이 아니었다. 현지에 잘 적응하려면 기초부터 튼튼히 해야 한다는 먼저 이민 오신 분들의 조언으로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지만, '안녕하세요' 이상을 말할 줄 모르니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세 자릿수 곱하기를 쉽게 할 수 있는 중학생은 며칠만에 3학년이 되었다. 새벽에는 무궤도 전기버스를 타고 한인촌에 가서 문법과 어휘를 배우고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외국인을 위한 포르투갈어(português para estrangeiros)'는 반까지도 진도가 나가지 못한 채, 아직 책장에 꽂혀있다. 3학년 수업은 쉽지 않았다. 들리면 들리는 대로, 들리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대로 앉아 있었다. 눈치만 멀쩡했다. 방과 후에는 아이들과 놀았다. 노는 시간도 회화 연습이었다. 친구들은 '축구할래?'라고 묻지 않고 '공놀이할래?(Que joga bola?)'라고 말했는데, 공놀이가 곧 축구였기 때문이다. 1970년 월드컵 세 번째 우승에 빛나는 브라질이었다. 학교마다 축구를 제일 잘하는 흑인 소년들은 모두 뻴레라고 불렸다. 축구 황제 펠레의 발음은 포르투갈어로 뻴레인데, '레'에 강세가 붙는다. 학원에서 배운 문법을 동생들에게 전수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따랐지만, 간단한 단어를 가르치는 데 그쳤다. 동생들은 열심히 배우려 하지 않았고 나도 열심히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실증과 게으름도 당시에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일 년이 다가오면서 동생들은 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문장을 쏟아놓게 된다. 저녁을 먹고는 텔레비전 만화를 같이 보았는데, 돌이켜 보면 회화 듣기 시간이었다. 밤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중학교 수학 참고서를 폈다. 방정식을 풀던 중학생이 덧셈과 곱셈만 하고 있다는 현실이 나를 분발시켰으나 독학은 쉽지 않았다.
부모님은 얼마간 망설이다가 장사를 시작하셨다. 대다수 교민은 의류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찍 와서 성공한 사업가도 더러 있었다. 새로 온 사람들 중 일부는 그 옷을 받아 지방으로 돌아다니며 파는 벤데도르(vendedor)에 뛰어들었다. 부모님은 주위를 살펴본 후, 우선 간단히 할 수 있는 지갑 만들기를 시작하셨다. 당초 아버지가 생각했던 계획을 실천하기에는 모든 상황이 불확실했다. 일단 그냥 부딪혀 나간다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중학생이 가족의 생존 계획을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우선 포르투갈어 습득이었다. 이후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세상의 모든 일은 그럴 수 있었고 그럴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둘째 날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할 대책과 향후 전망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각국 간 정책 협력과 국제 공조가 긴요하다는 제안은 언제나 아름다운 말이지만 쉽지는 않다. 자기 나라를 위한 손익 계산이 바탕에 깔려 있다. 휘날리는 명분을 믿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쉬는 시간에 프랑스 중앙은행 직원이 친절하게 다가왔다. 다음 달에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란다.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명함으로 교환했다. 그의 영어에서 불어 억양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정책 수립과 집행에 대한 토론이 이어진 후, 기념 촬영을 했다. 그런 일이 있었지라고 간단히 남을 기억일 테지만, 무슨 회의든 프래카드를 뒤로 하고 진지하게 모여서 사진을 남긴다. '다음에 보자!'를 말하며 헤어짐이 섭섭한 듯 악수했다. 브라질 중앙은행은 동전을 이용한 기념품을 선물했다. 받아 적은 발언 내용을 챙기며 보고할 차례와 정책 방향의 시사점을 점검했다.
"지금은 불경기다.(Agora fraco.)", "내일 보자!(Ate amanhã!)" 3월 25일이라는 이름의 빈찌씽꼬데마르소(Vinte e Cinco de MarÇo) 시장 상인들은 물건을 사지 않겠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일이 되어도 '내일 보자'를 반복하였다. 내일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지갑은 조금씩 팔렸으며, 우리가 아미고(amigo)가 되었을 때 제품은 따봉(tá bom)이 되었다. 그때는 물론 몰랐지만, 집권 초기 군사 정권이 이른바 브라질의 기적이라는 경제 호황을 이룩하던 시기였다. 90%대인 인플레이션을 10%대까지 낮추고 실업률 3% 이내의 완전고용을 이룩했을 때,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동안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시장 상인들은 힘들다고 말하고 있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죽는소리를 하기 마련이다. 이후에 찾아올 진짜 어려움을 물론 알지는 못했으리라. 자동차와 텔레비전 같은 물품이 중산층에게도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군사 정권은 1970년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을 사회 분위기 고양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동네에서 우리 집을 제외하고는 자가용 없는 집이 없었다. 88올림픽에 즈음하여 우리나라에서 마이카 붐이 일어나기 거의 20년 전이었다.
그래도 가족 중에서 브라질 말을 제일 잘했으므로 어머니가 지갑을 팔러 나가실 때면 종종 따라가서 '싸다'와 '비싸지 않다'를 반복했다. 당시 익혔던 계산의 기억은 지금까지 숫자를 특히 잊어버리지 않게 하였다. 화폐 단위는 현재의 헤알(real)이 아닌 끄루제이로(cruzeiro)였는데, 액면에 10이라는 도장이 커다랗게 찍혀 있었던 너덜너덜해진 돈이 원래는 1,000 끄루제이로였던지 또는 10,000 끄루제이로였던지 기억나지 않는다. 물가 오름세가 엄청나서 우리 가족은 한국에서 가지고 온 달러를 조금씩 끄루제이로로 바꾸어 사용했다. 달러가 줄어드는 일을 제외하고는 큰일 없이 어제가 가고 오늘이 왔으며 학년이 바뀌어 4학년이 되었다. 월반은 아니었다.
장로 할아버지 댁 건너편에 적당한 집을 얻었다. 이민 온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던 한인촌이 아니었다. 그 시절 한인촌은 지금의 봉헤찌로(Bom Retiro) 코리아타운과 조금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집을 사지 않았으니 당연히 월세였다. 1층에 거실, 식당, 화장실, 창고 그리고 작은 뒷마당, 2층에 큰 방과 작은 방, 화장실이 있었다. 침대는 매트리스만 샀으며, 받침틀은 목재를 사서 아버지가 만드셨다. 목수도 아니셨지만, 톱과 망치로 무엇이든 잘 만드셨다. 냉장고와 식탁을 구입하고 이민 가방을 풀어 옷가지를 정리했으나 손으로 들고 온 짐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여러 통의 인삼은 지겹게 먹은 삼계탕이 되었고 참기름을 바른 김은 꽤 오래 식탁에 올라왔다. "아프면 안 된다.", "건강이 최고다." 말씀은 반복되었다. 아무래도 이민 준비는 여행 준비보다는 철저했다. 테이프로 가져온 이미자의 노래는 어린 나이에도 구슬펐다.
아버지가 산뚜스(Santos)에 다녀오셨다. 부산에서 배로 부친 이삿짐이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기다려졌다. 들고 오지 못한 옷가지, 고등학교까지의 수학책, 몇 가지 가재도구, 브라질에서 잘 팔린다는 구슬 핸드백을 만들 수 있는 약간의 원단이 나무 상자에 들어 있었다. 일부 물품이 중간에 사라졌다고 들었지만 피해는 크지 않았다고 하셨다. 크레용 제조 기계를 창고로 옮겼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크레용, 크레파스, 색연필, 그림물감 등을 제조했을 뿐 아니라 이들을 만드는 기계도 만드셨다. 일제 기계를 참조하셨으나 눈으로 본 외관을 설계 도면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제조 과정을 수동에서 반자동으로 바꾸셨다. 기계 제작소는 도면대로 만들어 납품해 주었다. 가져오신 크레용 기계는 주력상품이 크레파스로 바뀌면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장치였다. 아버지에게 사업이란 주로 무엇을 만드는 일이었으며 도매로 사서 소매로 파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몇몇 친구들과는 학교에서 놀았고 동네 친구들은 따로 있었다. 종종 눈을 옆으로 찢으며 꼬레아누라고 놀리던 호베르또도 굳이 따지자면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누가 누구를 차별하기에는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그 사이 색들이 너무 다양하게 어울러져 있었다. 한국 학생이라고는 우리 동생들을 제외하면 비슷한 시기에 이민 온 윤수와 진수가 있을 뿐이었다. 남자애들은 시간만 나면 축구를 했고 여자애들은 쉬는 시간에 재잘재잘 얘기를 하거나 서로 머리를 빗겨주며 매니큐어를 발랐다. 초등학생도 손톱에 무관심하지 않았고 선생님이 예쁜 색깔을 발라주실 때도 있었다. 국어, 산수, 사회, 자연이 모두 내게는 어학 실습 시간이어서 연필을 쥐고 분투하였지만, 파티 시간의 댄스는 따라가기 힘들었다. 몸짓이 춤이 되는 시간은 노력으로 되지 않았다.
한 집을 지나서 길을 건너면 이탈리아에서 온 가족이 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동네에는 포르투갈도 스페인도 아닌 이탈리아계 사람들이 많았던 듯하다. 그중 막내인 루시아누는 우리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한 학년 위여서 학교에서는 자주 어울리지 않고 동네에서만 같이 놀았다. 둘째 동생 또래였다. 터울이 큰 누나들은 한국의 초가을 날씨에도 춥다고 야단이었다. 주사위를 굴려 부동산과 주식을 사고파는 은행 놀이를 배우고, 한국에서 가지고 간 윷놀이를 가르쳐주었다. 동요에 맞추어 나무 블럭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옆 사람에 전달하는 놀이도 기억난다. 가사의 뜻을 완전히는 몰랐지만 노래를 따라 부를 수는 있었다. 또 축구선수를 상징하는 작은 원반으로 플라스틱 공을 튀겨 옮겨서 골대에 넣는 게임도 있었는데 원반 위에는 선수들 사진이 스티커로 붙어 있었다. 양팀 선수의 이름을 거의 외울 수 있었다. 노는 것도 공부였다. 초대를 받아 그 가족들과 식사했으며 루시아누도 가끔 우리 집에서 밥을 먹었다. 한국에서 가지고 왔던 김을 까만 종이라고 불러서 웃었다. 브라질 아이답게 응원하는 축구 클럽도 있었다. 언제나 영웅이었던 뻴레는 루시아누에게 선물로 받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산뚜스 팀의 페넌트 사진으로 남았다.
길 건너편에는 빵과 커피 그리고 설탕과 우유 등을 파는 빠루(paru)라고 부르는 가계가 있었다. 아침마다 작은 에스프레소 한 잔에 바게뜨로 만든 샌드위치를 먹는 아저씨들로 북적였다.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설탕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가기 전, 사전을 찾으니 아수까루(aÇucaru)라고 나와 있었다. 그러면 '데메 아수까루(De me aÇucaru)'다. 그러나 아저씨에게 아침 인사를 하며 '데메 아수까루'를 반복했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두리번거리다가 설탕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저씨는 웃으며 '아쑤~까루'라고 발음했다. '쑤'에 액센트가 있다는 뜻이었다. 반복하여 연습시킨 후, 발음을 제대로 할 때야 설탕을 팔았다. 어느 언어에서든 강세와 높낮이는 중요하다. 포르투갈어는 대체로 알파벳대로 읽지만 역시 예외는 있다. 브라질을 '브라질'로 말하지 않고 '브라지우'라고 발음한다. '지'에 액센트가 있다. 더욱이 알(r)의 경우 'ㄹ'로 소리내지 않고 혀를 심하게 굴리면서 'ㅎ'으로 읽는다. 축구선수 로날도는 호나우두가 된다. 몇 달이 지나 혓바닥을 굴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물론 몰랐지만, 미국 영어가 영국 영어와 다소 다르듯 브라질어는 포르투갈어와 조금의 차이를 가진다.
건너편에서 우리 집을 볼 때 오른쪽에 있었던, 작은 정원이 있던 집이 예뻤다. 승용차 4대가 달릴 수 있었던 차도 양옆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인도가 있었는데, 그 집 앞에만 주인 아저씨의 정성으로 포르투갈 특유의 물결 무늬 블럭이 깔려 있었다. 언제나 '봉지아!(Bom dia!)'로 정원을 보살피는 아저씨는 나만한 나이에 부모님을 따라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하셨다. 하루는 동네 성당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으셨고 부모님도 승낙하셨다. 교회와 성당을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는 나이였다. 장엄보다는 경건이 어울리는 분위기에서 가족의 안녕을 기도했지만 이후 성당에 나가지는 않았다. 미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저씨도 소개만 시켜 주셨을 뿐, 성당에 가자는 말을 다시 하지는 않으셨다. 무슨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모자이크 맞추기에서 잃어버린 퍼즐의 빈 칸이 되었고 성당은 종교가 아닌 문화 체험 학습으로 남았다. 우연은 가끔 계기가 되지만 대체로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초청해 주신 장로 할아버지의 한인 교회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았는데, 우리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탓이었을 것이다. 이민 오기 전 알려준 현지 여건과 실제로 겪어보는 상황은 전혀 달랐다. 초청자에 의존한 아버지도 문제였지만 당시 인터넷도 없는 상황에서 지구 반대편 사정을 자세히 알기는 힘들었으리라.
루시아누가 돌아가고 저녁이 되면, 동생들과 가위로 오려 만든 카드 따 먹기와 동물원 놀이를 하였다. 한국에서 가져온 아주 작은 장난감들이 있었다. 카라멜을 사면 경품처럼 작은 플라스틱 원숭이, 기린, 하마, 코뿔소 등 다양한 동물들이 무작위로 나왔다. 카라멜을 먹으니까 사자가 생긴 것인지, 호랑이를 얻으려고 카라멜을 샀던 것인지. 녀석들은 하나씩 둘씩 브라질 이름을 얻었다. 그중에서도 코뿔소는 확률을 뚫고 왜 그렇게 유난히 많이 나왔을까? 코뿔소 떼는 이들의 대표가 되었다. 동물들을 분류하여 울타리를 치면서 재배치하는 작업에 무슨 흥미가 있었을까? 맹수들은 때로 으르렁거렸고 새들은 하늘을 날았다. 어린이들은 종종 어른들이 모르는 곳에서 재미를 찾는다. 중학생도 때로는 어린이였다.
소파가 있어야 할 거실에는 재봉틀과 프레스 기계가 놓였다. 친척도 친구도 없는 땅에서 달러는 끄루제이로로 변했다가 사라졌다. 아버지는 다른 아저씨들과 어찌 살아가야 하는지를 논의했지만 대책이 없기는 아저씨들도 마찬가지였다. 포르투갈어를 하지 못한다는 말은 벙어리라는 뜻이었다. 계획은 수립되었으나 실천은 어려웠다. 때로 아들, 딸을 데리고 오셨으나 아무리 애들이라도 가끔 만나는 사이란 서먹하기 마련이었다. 팔을 걷어도 처음 겪는 환경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아저씨들은 동생들과 함께 대가족을 이루었기에 일손이 많아서 부모님이 부러워하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가래떡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던 최씨 아저씨는 브라질에 남으셨으나, 자주 오시던 강씨 아저씨와 한씨 아저씨는 미국으로 재이민을 떠나셨다고 한다. 국제 우편이 몇 번을 오가다가 끊기게 되는 시간은 자연스러웠다.
내일 보자는 말이 반복되는 가운데서도 가끔 내일은 오늘이 되기도 했다. 새로 시작한 구슬 핸드백이 그럭저럭 팔렸다. 한국이었으면 아마도 팔리지 않았을 강렬한 원색이 인기 있던 정열의 나라였다. 시장을 넘어서 바자르(bazar)라고 불리는 양품점을 뚫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수입은 지출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제는 숫자와 색깔의 단어를 익힌 어머니가 시장을 돌 때 언제나 내가 함께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건넛방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언성이 새어 나왔다. 결단을 필요로 하는 시점은 머뭇거림을 허용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살다 보면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구슬 핸드백을 팔기 위해 바자르에 들어갔던 어머니는 가게 주인인 대만 아저씨와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가 크레용 기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새로운 사업거리를 찾고 있던 그 아저씨와 다른 친구 하나가 관심을 가졌다. 그 당시 브라질은 공산품의 대부분을 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어서 현지에서 크레용을 생산하여 판매하면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훗날 배운 용어를 사용하면 수입대체산업 육성이었다. 아저씨라기보다는 30대 청년이었다. 대만도 일제 식민지를 겪은 탓인지 일본어 대화가 가능했다. 진상과 소상이라는 성은 기억나지만 이름은 잊었다. '상'은 일본어였다. 어쨌든 아버지의 이민 계획 일부를 달성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신들은 자금과 판매를 담당하는 반면, 아버지는 기술과 생산을 담당하는 동업을 제안했다. 어머니는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 유출되기 마련이며 생산하면서 브라질 전역에 걸친 매출액을 계산할 수도 없으니 기술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기계를 넘기고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셨으나, 아버지는 동업을 통하여 색연필과 그림물감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면 안정적인 정착이 가능하다고 반대하셨다. 무엇을 판단하기에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느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보라고 부모님이 부르셨을 때, 돌아가기보다 그냥 브라질에 있는 편이 낫겠다고 말씀드렸다. 친구도 어느 정도 사귀고 있었고 브라질 말도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데, 공부하기 싫었던 탓도 있었다.
정착하느냐 역이민하느냐의 선택 말고도 재이민을 가는 방법도 있었는데, 당시 브라질뿐 아니라 파라과이나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으로 가는 경우도 꽤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민 자체를 힘겨워하고 있어서 미국도 우리 땅은 아니라고 하셨다. 재이민도 절차가 까다로울 뿐 아니라 시도하다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 사이 시간이 흘러 결국 브라질에 남는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셨다. 지금 결심하고 귀국하여도 아이들이 한 학년을 꿇을 수밖에 없는데, 머뭇거리다가 자칫 2년 이상 늦어진다면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는 말에 아버지도 어쩌지 못했다. 큰아버지와의 동업 실패도 교훈이 되었다. 한국에서 살림만 하시던 어머니가 브라질에서는 생계 전선에 섰다. 대체로 외국에서는 여자들이 더 잘 적응한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적기 마련이었다. 또 6.25 직후 가족이 모두 피난 와서 외할머니, 외삼촌들, 이모들이 기다리는 어머니와 이제는 관계가 소원해진 큰아버지만 남은 아버지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모에게서 편지가 왔다. 외할아버지는 우리가 브라질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 한인 신문에 우리나라에서 민방공 훈련이 시작됐다는 기사가 나올 때쯤이었을 것이다.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모르나 대만 아저씨들에게 크레용 제조 기술을 알려주면서 기계를 파는 방안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진상과 소상 아저씨들은 종종 우리 집에 들러서 기계 작동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아버지는 염료를 섞은 뜨거운 파라핀을 적정 온도로 식히는 방법과 다양한 색깔을 만들어 내기 위한 배합 비율 등을 알려주셨다. 언제쯤이었던가? 사순절을 앞두고 열렸던 화려한 카니발 기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어렴풋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리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질문은 하나의 형식이었을 뿐, 부모님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사실 중학생이 무엇을 알았겠는가? 마침내 기계가 팔리면서 아버지의 꿈은 사라졌다. 힘찬 기업이 되었을 수도 또는 녹슨 고철로 바뀌였을지도 모르는 기계는 얼마의 돈으로 남았다. 우연이었다. 구슬 핸드백을 팔려고 그 가게를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 테지. 귀국하기 전, 진상과 소상 아저씨는 우리에게 작별 선물로 악어 공원을 구경시켜 주고 저녁을 샀다. 수많은 악어 떼는 기억나지만 무엇을 먹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몇 년이 지난 후, 대만 아저씨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크레용 제품과 제조 과정에서의 애로사항을 들고 우리나라를 찾게 된다. 고향을 방문했다가 브라질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품질이 좋다고 칭찬하시며 해결 방안을 제시해주셨다.
귀국하는 수속도 쉽지 않았겠지만 이민 준비보다는 상대적으로 간단했으리라. 한국에서 가지고 온 물건 중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았으며 재고로 남아있던 원단을 모두 지갑으로 만들었다. 빈찌씽꼬데마르소 시장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후에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지만, 기계를 매각하고 나니 브라질에서의 생활비와 왕복 비행기 요금 등 총지출 중 상당 부분을 회수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크레파스와 색연필을 루시아누 등 친한 아이들에게 이별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선생님들께 인사하고 학교를 떠났다.
냉장고 등 덩치 큰 물건과 당장 필요하지 않은 옷가지 등을 배편으로 한국에 부쳤다. 그런데 브라질 말을 거의 하지 못하셨던 아버지가 어떻게 이런 절차를 무사히 마치실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재봉틀과 프레스 기계를 구입하신 일도 마찬가지였다. 새삼 떠오르는 질문을 아버지 생전에 여쭈어보지 못했다. 어떤 의문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여쭈어보았을 때 어머니도 잘 기억하지 못하셨다. 살아오면서 가장의 어깨는 항상 무거웠다.
귀국하기 전날, 중학생과 초등학생 둘은 다시 찾겠다는 간단한 메모와 함께 가지고 놀던 플라스틱 동물들을 작은 깡통에 넣고 뚜껑을 닫아 뒤뜰에 묻었다. 코뿔소와 하마 그리고 사자와 호랑이들이 병마용처럼 매장되었다. 이들을 꺼내려면 다시 와야 한다는 비장한 어린 결심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생활이 크게 바뀌리라는 예감이 있었으므로 순장은 그에 따른 의례처럼 행해졌다. 또 다른 변곡점이었다.
부산교육청이 이전에 다니던 중학교로 배정하여 등교하니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2학년이 되어 있었다. 친구들과는 반말을 했지만 모르던 아이들은 1학년이 2학년에게 말을 놓는다고 군기를 잡았다. 등굣길 버스 안에서 마주친 초등학교 여자 동창생을 피해 콩나물 사이로 숨었다. 빳빳하게 세운 교복 위에서 아라비아 숫자 2가 빛나고 있었다. 로마자 Ⅱ는 아니었던 것 같다. 굳이 피할 필요가 있었을까? 사춘기 때문이라고 하자. 동생들은 새로 정착한 집 근처의 다른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중학교는 추첨 배정이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걱정하시던 고등학교 입시는 귀국하자 무시험 추첨방식으로 바뀌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도 예고 없이 변한다. 그리고 생각난다. 어느 수업 시간에 어떤 선생님이 이민은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의식하고 하신 말씀은 아니었겠지만, 어느새 돌아온 탕아가 되었다.
1년 후, 새로운 사업거리를 찾으신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다. 그러나 중학교를 옮긴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따뜻한 물에서 찬물로 옮겨가는 사람이 더 추운 법이다. 무엇을 제조해야 한다는 의지는 자본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교묘한 유혹 앞에서 간절함은 무력했다. 어머니도 노동력을 보탰으나 손익 계산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품질 제일주의는 힘이 없었다. 확신은 이루어지기 어렵고 의심은 실현되기 쉬웠다. 성실과 근면은 아버지의 깃발이었지만 가장의 무게는 그물에 걸리는 바람과 같았다. 아흔이 다가오면서 치매에 걸리셨을 때 아버지는 창문 앞에서 말씀하셨다. "멀리 대동강이 보인다." 아버지의 시간은 길을 돌아 고향을 찾았다.
힘들 때면 생각했다. 돌아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다수 교민처럼 의류 제조와 판매를 하고 있을지 모르지. 아니면 더 낫거나, 더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더욱이 애초에 떠나지 않았다면? 역사에 가정은 없으며 개인사도 역사다. 나의 궤적은 초조와 번잡에 사로잡히면서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누구는 땅을 흔들며 달려오는 회색 코뿔소를 사전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징조를 사후적으로 해석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철이 들면서 여러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마다 회색 코뿔소가 지나갈 수 있는 위험을 애써 피해 살아왔다. 대안은 동시에 주어지지 않았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망설였다. 회색 코뿔소로 자라기 전, 어린 코뿔소들과 함께 곡선의 기울기가 바뀌는 변곡점을 겪었으니까. 그래도 대학을 다니면서는 머지않아 생계 대신 생활을 걱정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압축 성장이 지속되던 시절이었다. 내일이 반영된 오늘이 어제를 해석한다. 어제가 조금씩 나아지면서 실현된 확률을 다행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호텔 로비로 내려가니 잘생긴 브라질 남자가 다가왔다. 간단한 포르투갈어로 반갑다는 인사를 나누었다. "무이또 쁘라제르!(Muito prazer!)" 가늠하기 쉽지 않았지만 마흔 정도는 되어 보였다. 어디 가기를 원하느냐는 물음에 적어 온 종이를 내밀었다. 후아 도또르(Rua Dr.) 다음에 엘리지오 데 까스뜨로(Elίsio de Castro)로 시작되는 집 주소는 훈련소에서 단련된 군번처럼 기억되어 있었다. 집을 나설 때마다 아버지는 적어놓은 주소가 들어 있는지, 자식들의 주머니를 확인했다.
도심에서 이어진 큰길은 이삐랑가(Ipiranga) 공원을 지난 후, 오른쪽으로 꺾어지면서 동네로 향하는 도로로 이어졌다. 야자수처럼, 바나나 나무처럼 이국적인 나무들이 굵은 나이테를 자랑하며 성벽 같은 담을 에워쌌다. 잘먹고 잘사는 저택들이 오랜 기간 세수하지 않은 표정으로, 비싼 옷을 세탁하지 않은 느낌으로 스쳐 지나갔다. 경제 성장이란 결국 도시를 목욕시키는 과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들이 낮아지면서 살던 동네로 접어들었다. 학원과 시장을 다녀오던 길이 살아났다. 무궤도 전기버스들이 차창을 지나쳤다.
버스를 이용할 때면 앞문으로 타고 뒷문으로 내렸다. 중간보다 조금 앞쪽에 앉아 있던 차장이 버스표 또는 현금을 받았다. 놀이기구 타는 입구에 있을 법한 회전 막대기를 통과하여 뒤쪽으로 이동했다. 버스는 집에서 멀지 않은 쎄지 에스꼴라(SESI Escola)를 시발점으로 하였기에 한인촌까지 대체로 앉아서 갈 수 있었다. 내려야 할 정류장이 다가오면 좌석 위 양옆으로 길게 이어진 줄을 당겼다. 운전석에서 들리게 땡땡 소리가 났다. 내리지 못할까 항상 주의하였지만 졸다가 지나친 적은 없었다. 긴장이 언제나 함께하던 시절이었다.
그럴 수 있을까? 재개발과 재건축이란 단어가 브라질어 사전에는 없단 말인가? 새 건물이 몇 군데 생긴 듯도 했지만 도로 폭과 집들이 그대로였다. 매주 토요일에는 동네 사람들이 길을 막고 축구 놀이를 했었다. 축구가 아니라 축구 놀이였다. 골대에 공을 넣는 경기가 아니라, 둥그렇게 둘러서서 손으로 배구공을 떨어뜨리지 않게 튀겨 올리듯, 할아버지부터 아이까지 둘러서서 발로 제기를 차듯 공을 떨어뜨리지 않게 주고받으며 놀았기 때문이었다. 프로선수처럼 현란했다. 지나가는 차들은 대부분 다른 도로로 돌아갔으나 굳이 가겠다면 공을 둘러싼 동그라미가 잠시 피해주곤 했다.
"여기 세워주세요!" 311호라고 적힌 집을 어렵지 않게 찾았을 때, 집집마다 페인트 색깔은 달라져 있었다. 벽을 공유하는 타운하우스의 일부였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대여섯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가이드가 오래전, 아니 36년 전, 여기 살았던 꼬레아누가 세월을 뛰어넘어 찾아왔다고 말하자, 옛집에서 살고 있던 아주머니는 남미 사람 특유의 과잉 제스츄어로 두 팔을 벌리며 환영한다고 외쳤다. 예전에 잠시 살았다고 내가 포르투갈어로 말했더니 같이 있었던 아주머니들도 합세하여 손뼉을 쳤다. 그러나 알고 있던 이웃들에 대해 물었을 때, 시조의 한 구절처럼 집들은 의구하되 사람은 간 데 없었다. 에스프레소를 팔던 빠루는 여전히 문을 열고 있었으나 아수까루의 발음을 교정해주었던 아저씨는 물론 계시지 않았다. 나이 든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그 앞에서 놀던 루시아누도 알아보지 못했을 테지. 주고받던 편지도 점점 브라질 말을 잊어버려 한 장을 채우기도 어려워질 무렵, 우리 집의 잦은 이사가 반복되면서 몇 년 이어지지 못했다.
아주머니가 집에 들어와 보고 싶냐고 물었다. 그 정도는 눈치로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예, 감사합니다'로 대답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달라. 집 안을 정리하고 오겠다'는 말은 그냥 알아들었는지 또는 통역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오래지 않아 나온 아주머니를 따라 들어갔다. 불감청(不敢請)이었지만 고소원(固所願)이었다. 현관에서 보는 구조는 그대로였고 2층으로 통하는 계단도 여전하였다. 올라가니 방들과 화장실의 문이 보였지만 방문을 열지는 않았다. 내려와 1층 거실은 기억보다 작았다. 창고 문을 옆으로 식당을 지나 뒷마당으로 나갔다.
작은 뜰에는 여전히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묻은 기억을 꺼내 볼 생각은 애초에도 없었지만 땅은 견고했다. 그러나 세월의 지층 앞에 돌아와 중학생과 함께 서니, 코뿔소와 그의 친구들이 사라지지 않고 변함없이 묻혀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나를 불러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나와의 약속을 우연히 지킨 셈이었다. 변곡점의 매듭 하나를 풀었다. 그런 사실까지 알 리 없는 가이드가 지금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갑자기 생각나는 영어 단어가 이모셔널(emotional) 밖에 없었다. 감사하다는 오브리가두(obrigado)를 거듭 말하며 집을 나왔다. "천만에요." 푸짐한 브라질 아주머니가 감동적으로 배웅해주었다.
또 가고 싶은 곳이 없느냐고 물었다. 학교가 그 위치에 있다면 가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같으면 구글 지도로 검색할 수 있었겠지. 이전했을 가능성도 높았지만, 옛 위치는 선명하게 기억났다. "집 앞에서 좌회전한 후, 큰길을 따라 곧바로 가주세요." 그러면 오른편에 있을 터였다. 아니면 할 수 없지. 그런데 놀랍게도 쎄지 에스꼴라(SESI Escola)라는 현판과 함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출발을 기다리는 무궤도 전기버스 몇 대가 보였다.
어린이 걸음으로 집에서 15분 정도면 충분하였다. 쎄지(SESI) 마크가 새겨진 윗주머니만 달면, 아무 흰 웃옷도 교복이 되었다. 넓지 않은 운동장 주변으로 배치된 단층 건물 몇 채가 전부였다. 도나 달씨(Dona Dalsi)라는 키 큰 담임 선생님은 친절하셨고 이제는 이름을 잊은 교장 선생님은 풍채가 당당한 미인이셨다. 영어를 조금 안다고 대답했더니 자기 소개를 해보라고 말씀하셨는데,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아임 파인 땡큐, 앤드 유?(I'm fine thank you, and you?)' 수준을 넘지 못했다. 대부분 여자 선생님이셨고 남자 선생님 한 분이 계셨는지 확실하지 않다. 한 학년은 한 반이었던 듯하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쎄지(SESI)라는 대기업이 후원하는 학교였다. 시간이 흘러서 큰길을 몇 번 건너면 상당히 큰 초등학교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쎄지는 작아서 부대끼기 좋았다.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벨을 누르자 젊은 경비원이 나왔다. 가이드가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경비원이 여쭈어본다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 교장 선생님도 함께 나오셨다. 선생님들은 모두 바뀌어 있었지만 학교 구조는 그대로였다. 운동장은 기억보다 작아져 있었으나 건물의 위치는 변하지 않은 듯했다. 이제는 통일된 교복으로 귀여운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초록색 바탕과 노란색 마름모꼴은 파란 하늘 별자리 속에 새겨진 '질서와 전진(ORDEM E PROGRESSO)'의 염원과 함께 브라질 국기가 되어 나부꼈다. 가이드가 국제회의에 참석하러 온 차에 학교를 방문했다고 설명했다. "당신은 우리 학교의 자랑스러운 동문입니다." 교장 선생님은 재학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면 어떻겠냐고 물었고 가이드는 스마트폰으로 우리를 찍었다. 해맑게 웃고 계신 교장 선생님과 손가락으로 브이(V)자를 그리는 아이들과 함께 커다란 국기는 바람에 펄럭이며 액자가 되었다. 돌아와 생각하니 무엇인가 선물을 준비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회의를 마치고 방문할 여유가 있을지도, 살던 집과 학교가 30여 년이 넘도록 남아있을지도 예상하지 못한 시간이었다.
약속했던 시간이 남아서 찾아간 이삐랑가 공원의 빠울리스타 박물관(Museu Paulista)은 노란 베이지색으로 아름다웠다. 땀을 흘리며 사진을 찍었다. 시내 중심의 대성당도 장엄하게 건재했다. 주변의 높은 빌딩 숲도 그대로인 듯했으나 일부는 새로 건축되었을 테지. 옛날에는 없었던 노숙자들이 광장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거나 잠을 자고 있었다. 기마경찰은 여기서도 당당했다. 지갑을 팔러 다녔던 빈찌씽꼬데마르소 시장은 여전히 유럽식 건물로 고풍스러웠지만, 내부가 새로 단장되어 있어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가이드와 함께 시장 카페에 앉아 시원한 과라나(guarana)를 마셨다.
조금 달리니 음식점과 마트의 한글 간판들이 제법 넓은 코리아타운을 표시했다. 교민들의 옷가게가 남미 제일이라는 패션 거리를 자랑하고 있었으나 저녁이 다가오면서 하나씩 둘씩 두꺼운 셔터를 내리기 시작했다. 윤수와 진수의 소식을 아는 사람도 있었을 테지. 타임머신은 호텔로 돌아왔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비행시간은 반대편에서 올 때보다 더 걸린다. 편서풍을 거슬러, 메모와 기억에 의존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좌석이 넓게 느껴졌다. 내용은 상세해야 했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어느 나라 대표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도 중요하지만 추진될 정책 방향에 대한 예상이 포함되어야 했다. 내 의견을 첨부했다. 창밖의 양 떼 구름을 보면서 기내식을 먹었다. 날짜변경선을 넘으면 시간을 건너뛰어 내일이 된다. 눈이 감겼다.
중학교 1학년에서 1년을 건너뛰어 다시 1학년이 되려고 가는 귀국길은 착잡하였다. 부모님이 계셨으므로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세상이 그렇게 험난할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돌아온 부산은 그동안 많이 바뀌어 있었다. 스치는 바람도 다른 느낌이었다. 외할아버지가 계신 곳을 찾아 절을 했다. 공원묘지였다, 시간을 정리하며 공책에 볼펜으로 눌러써서 '한 소년이 본 브라질'과 '태평양을 건너서'라는 두 권의 책을 만들었다. 삼촌들과 이모들이 세상에서 단 한 권씩밖에 없는 기행문의 독자가 되었다. 큰아버지는 그사이 회사를 옮기시고 서울로 이사 가서 계시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외풍에도 집안은 따뜻했기에 못 견딜만하지는 않았다. 집을 옮길 때마다 학교와의 거리는 멀어지고 방 크기는 작아졌다. 고등학생도 어른은 아니었다. 시험은 모든 일에서 얄팍한 핑계가 되었지만 재수까지 하고 말았다. 누구에게나 힘들었던 시절에 대학을 졸업한 후, 좋은 직장을 구하고 예쁜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아내는 살림을 일으키며 아이들을 키워냈고 아들들은 커가면서 제 몫을 해냈다. 부서를 옮기며 승진을 기다렸고 자식을 키워서 혼주가 되었다. 어제가 조금씩 나아지면서 다행이란 말이 감사라는 언어로 슬며시 바뀌기 시작했다. 재해석된 어제는 내일의 힘이 되었다. 늦은 공부로 논문을 썼으며 조직을 정년퇴직한 후 서울에서 멀지 않은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재무관리와 투자론을 강의하면서 금리와 환율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썼다.
돌이켜 보면, 소리에 놀라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는 연꽃과 같이, 작은 일에 기뻐하고 작은 일에 슬퍼했다. 따져보면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럴 수 있는 일들이 모여서 오늘이 되었다. 동전은 평평하고 주사위는 정육면체였다. 모든 일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 우연은 필연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땅에 묻힌 작은 코뿔소와 그의 친구들이 오랜 기간 잠들지 않고 가슴 속에서 뛰어다녀서 그리하여 마침내 옛집 뒤뜰에서 그 앞에 섰다면, 우연의 연속은 필연이 된다.
이민과 출장을 다녀왔지만 브라질 여행은 다녀오지 못했다. 언젠가 이구아수 폭포를 보고 싶다는 마음은 아직 근육이 힘을 쓸 수 있는 시간의 한계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꼭 그래야만 할 이유는 없지만, 만약 다녀온다면 예정되어 있었던 필연일 테고 그렇지 않다면 내 삶에 주어지는 확률이 없기 때문이다. 내일은 언제나 오늘 밖에서 고개를 숙이며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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