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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떡의 인문학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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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편은 흰 떡에 솔잎에서 발산되는 소나무의 정기를 불어넣은 떡이다. 조상들은 송편을 먹으면 소나무처럼 건강해진다고 여겼다.
송편은 흰 떡에 솔잎에서 발산되는 소나무의 정기를 불어넣은 떡이다. 조상들은 송편을 먹으면 소나무처럼 건강해진다고 여겼다.
예전 어머니들은 부엌에서 갓 지은 멥찹쌀을 주걱으로 조금 으깬 뒤 콩고물을 얹어 즉석 인절미를 해먹었다. 일명
예전 어머니들은 부엌에서 갓 지은 멥찹쌀을 주걱으로 조금 으깬 뒤 콩고물을 얹어 즉석 인절미를 해먹었다. 일명 '주걱떡'인데, 경주 지역에서는 '주개떡'이라 했다. 경주시도 주개떡 재현 사업에 나설 모양이다.
결혼 직후 신랑·신부 양가 집안에서 서로 주고받았던 혼수떡인
'안동찰떡'으로 불리는 '벙어리·버버리떡'.
인절미.
결혼 직후 신랑·신부 양가 집안에서 서로 주고받았던 혼수떡인 '이바지떡'.
팥시루떡.
인절미.
팥시루떡.

추석이 열흘 앞으로 다가섰다. 한가위하면 '송편'이 설날의 '가래떡'처럼 생각난다. 송편은 흰 떡에 소나무(솔잎)의 정기를 불어넣은 떡이다. 조상들은 송편을 먹으면 소나무처럼 건강해진다고 여겼다. 송편은 쌀가루에 무엇을 첨가하느냐와 무엇을 소로 넣느냐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예부터 민간에서는 '송편을 예쁘게 빚으면 처녀는 좋은 신랑감을 만나고 임신부는 예쁜 딸을 낳는다'는 말이 전해진다. 송편 속에 솔잎을 가로로 넣고 뒤 한쪽을 깨물어서 솔잎의 귀 쪽이면 딸을 낳고, 뾰족한 끝쪽이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개천절과 시루떡

인절미도 한국 떡의 3인방에 든다. 인절미의 한자명은 '인병'(引餠)이다. 차진 찰떡을 늘려 끊은 맛있는 떡이라는 데서 '인절미'란 이름이 유래했다.

그런데 가장 한국스러운 떡을 들라 하면 다들 '팥시루떡'을 꼽는다. 일제강점기 문인 최영년이 지은 '해동죽지'에 이 관련 내용이 나온다. 10월 3일은 단군이 세상에 내려온 날. 그래서 집집마다 시루떡으로 치성을 올렸다. '개천절의 떡'인데 결국 한민족의 시원이 되는 환인‧환웅‧단군의 삼신에게 바치는 떡인 셈이다.

이것과 연관된 별미 떡이 바로 '석탄병'(惜呑餠). 일명 '감설기'라 하는데 멥쌀가루에 감‧잣가루를 섞어 찐 것이다. '석탄'은 '떡을 아껴서 삼킨다'는 의미로 삼키기 아까울 정도로 맛이 좋다는 의미다. 아울러 그 옆에 매칭되어야 할 떡은 모르긴 해도 '백설기' 같다. 멥쌀가루를 고물이 없이 시루에서 쪄낸 떡인데 일명 '흰무리'로 불린다. 아무런 우끼(고명), 그리고 소를 첨가하지 않는다. 멀리서 보면 '백자' 같다. 시루떡이 '고사용'이라면 백설기는 백의의 민족을 상징하듯 너무 맑은 기운이 감돌아 삼칠일‧백일‧첫돌, 그리고 사찰의 각종 재(齋) 때도 사용했다.

◆이바지떡

결혼 때 양가 가풍이 녹아 들어간 떡이 있다. 신랑과 신부댁이 서로 자신의 떡을 주고받는데 이게 '이바지떡'이다. 일명 '혼수떡'으로 불리는데 보통 결혼 후 신부가 시댁에 가면서 갖고 가는 떡이고 그걸 받은 뒤 신랑댁에서 '답바지떡'을 보낸다.

시루떡과 백설기 사이를 파고든 건 단연 '절편'이랄 수 있다. 꽃무늬 등이 있는 둥글거나 네모난 판에 눌러 박아 모양낸 흰떡이다. 이것과 연관된 떡살은 한국 공예예술의 한 지평이다. 떡메가 가능하도록 하는 떡판도 온갖 찰떡을 만든 원천이었다.

이와함께 '두텁떡'도 알 듯하면서도 모르는 이가 많다. 쌀가루를 찐 다음 여러 소를 넣고 볶은 팥고물을 얹어서 쪄 만든다. '두께가 두텁다'고 해서 부쳐진 이름이다. 같은 이유로 '봉우리떡'이라고도 했다. 궁중식으로 사랑받았는데 왕의 생일 수라상에 올라갔다.

떡은 다 쪄내는 줄로만 아는데 기름에 지져낸 떡도 있다. 바로 '노티와 부꾸미'다. 부꾸미는 팔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찹쌀‧수수‧기장가루 등을 반죽하여 둥글게 지진 떡이다. 전라도에서는 부꾸미 또는 '흐드레떡', 평안도에서는 '지짐이', 황해도에서는 '막부치'라 했다. 이 연장에 있는 술안주가 바로 빈대떡이다.

◆신라스러운 약밥

신라에서 기원한 유래 깊은 떡이 있는데 바로 '약밥'이다. 삼국유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제1권 사금갑(射琴匣)조에 따르면 신라 소지왕의 목숨을 구해준 까마귀 이야가 나온다. 실제 궁실에서 그 까마귀를 위해 새해 첫 보름날 찹쌀을 갖고 약밥을 올렸는데 그게 약밥의 유래가 된다. 색이 어두운 것도 까마귀를 염두에 둔 것. 허균이 지은 팔도요리견문록인 '도문대작' 중에 '경주에서는 정월 보름날 까마귀에게 약밥을 먹이는 풍습이 있다'는 구절이 있다. 훗날 조선 연산군은 약밥을 이용해 아버지인 선조를 독살하고 임금자리에 올랐다고도 한다.

약밥은 사료가 뒷받침해주는 신라의 떡인 셈. 그런데 훗날 신라천년의 도시인 경주가 '황남빵'과 '찰보리빵', 그리고 황리단길을 축으로 성장한 '십원빵'으로 히트친다.

◆경주 주개떡

그런데 경주스러운 떡은 없을까? 최근 일명 경주찰떡, '주개떡'을 복원하려고 애를 쓰는 분을 열흘 전 경주에서 만나고 왔다. 경주의 대표적 차인 중 한 명인 조대환, 그리고 그의 구술을 체계화 하고 있는 선다원 최희정 대표다. '주개'란 주걱의 경주 사투리. 최부자댁은 물론 웬만한 집에서는 잔치국수 해 먹듯 수시로 해 먹었단다. 멥‧찹쌀을 주걱으로 대충 으깨고 콩가루를 묻혀 주걱으로 잘라내 투박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너무 강하게 으깨면 안 된다. 밥 알갱이가 30% 정도 살아 있도록 압착력을 조절해야 한다. 팥알갱이가 살아 있는 단팥죽의 식감을 연상하면 된다. 너무 치대면 자칫 인절미처럼 물러내린다. 경주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지방에서도 '주걱떡'이란 이름으로 존재했다. 황남빵과 찰보리빵으로 유명해진 경주시에서도 이참에 시식회 등을 통해 '주개떡 문화마케팅'에 나설 모양이다.

◆개떡과 송기떡

떡이 '달'이라면 빵은 '태양' 같다. 빵은 물성을 부풀게 하는 '이스트'를 넣지만 떡은 열기로 곡물의 가루를 찰지게 다져놓는다. 그런데 달과 빵의 경계에 있는 게 추억의 '보리개떡과 술떡'이다. 술떡은 막걸리를 사용하니 '술빵'이라 해야 더 어울릴 것 같다. 개떡은 그 옆에 '송기떡'을 품는다. 송기떡, 참 묘한 떡이다. 시루‧인절미만큼이나 백성과 동행한 흔적이 역력하다. 송기, 임진왜란 등 각종 전란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백성들이 구황식으로 사용한 소나무껍질이다. 해송은 안 되고 재래종 소나무여야 한다. 물이 가장 오른 4~5월에 소나무의 상순을 잘라 표피를 벗겨버리고 속껍질만 벗겨서 잘게 찢어 물에 우린다. 우려낸 껍질을 잿물에 다시 넣고 푹 삶은 다음 다시 맑은 물에 사흘 정도 담가 잿물을 빼낸다. 잿물 뺀 송피를 말려 가루로 만들어 멥쌀과 섞어 쪄내면 된다.

◆안동찰떡 탄생비화

안동찰떡은 찹쌀에 굵은 팥고물을 묻힌 것인데, 평안북도 신의주의 대표 떡이었다. 그런데 일제 때 남북한 왕래가 자유로워 쉽게 안동으로 흘러든 것이다. 인절미와 찹쌀떡, 그리고 시루떡의 기운이 오버랩되어 있다. 달달한 소를 넣으면 제주도 오메기떡에 가깝다. 현재 안동에는 '벙어리와 버버리'란 이름을 가진 안동찰떡 가게가 있다.

아무튼, 오랫동안 벙어리찰떡이 리더를 했다. 그 가계는 1978년 타계한 김노미 할매로부터 비롯된다. 둘째 아들 봉필 씨는 농아였다. 너무 가난해 김 할매는 함지박을 이고 거리로 나섰다. 1920년 일제강점기 안동의 최고 번화가 사무뜰(현재 조흥은행 안동지점 앞) 근처를 돌아다녔다. 손님들은 김 할매의 둘째 아들이 벙어리인 줄 알고 그 찰떡을 '벙어리 찰떡' '버벌네 찰떡'이라고 불렀다. 이와 관련, 벙어리 찰떡 측은 '벙어리 아들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버버리 찰떡 측은 '먹으면 벙어리가 될 정도로 차지고 맛있는 떡'이라고 달리 해석한다.

안동찰떡 골목엔 벙어리 외에 또 다른 떡집도 있었다. 2001년쯤 문을 닫은 '시장 찰떡'이다. 벙어리 찰떡은 고물로 쓰는 팥의 껍질을 벗기지만 시장 찰떡은 벗기지 않아 벙어리 찰떡보다 더 붉은 기운이 감돈다. 이 무렵 벙어리 찰떡 집에 김동순 할매가 등장한다. 그녀는 젊을 때 생활이 어려워 벙어리 찰떡 집에서 일을 도와주며 더부살이하다가 분가해 경안네거리 근처에서 '두꺼비 찰떡집'을 경영했지만 몇 년 가지 못해 문을 닫는다.

김노미 할매는 1960년쯤 일명 '보신탕 골목'으로 알려진 현재 중앙시장 근처를 거쳐 신시장 입구 옥야동으로 이사와 확고한 기반을 다졌고 옥야동도 점차 '찰떡 골목'으로 유명해졌다.

60년대 후반부터 김 할머니는 가업을 이을 만한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두 딸은 모두 찰떡을 외면했다. 어쩔 수 없이 김 할매의 장녀 권차임(2대 사장)을 거쳐 1972년 외손녀 천영조가 3대 사장이 되고 외종손 배재한이 4대 사장이 되면서 찰떡 가게 가계도가 완성된다.

이에 앞서 안타깝게도 2001~2003년 안동에서 벙어리찰떡이 사라진다. 명물 하나가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한 안동시청이 브랜드 부활 작전을 전개한다. 2001년 10월17일 안동시 명의로 안동대표 찰떡명을 '버버리'로 정해 상표등록한다.

그런 가운데 신 씨가 흐름을 파악, 2004년 11월쯤 버버리 찰떡 집을 먼저 개점한다. 그는 노하동 솔밤다리 근처에서 돼지숯불갈비 식당을 하던 중 안동찰떡 사업을 구상하고 2004년 8월쯤 천영조·김동순 할머니를 통해 떡 기술을 배운다. 얽히고 설킨 인연이었다.

두 집이 동의할진 모르겠지만 브랜드 전통성은 벙어리 측, 사업적 순발력은 버버리 측에 있다고 봐야될 것 같다. 그렇지만 4대째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벙어리의 전통성이 존중되는 동시에 '신생 부활 브랜드' 버버리의 기득권도 존중돼야 할 것이다.

버버리찰떡은 벙어리찰떡과도 송사를 겪었고 공교롭게도 영국 패션 브랜드 버버리와 명칭이 같아 또 상표권 분쟁을 겪는다. 특허청이 버버리의 상표 등록을 불허하자 2013년 소송을 제기, 결국 승소를 하게 된다. 버버리(벙어리)의 지역성을 인정해준 것이다.

wind30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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