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하지 그랬어. 아니면 잘 좀 태어나거나." 영화 '내부자들'에서 주인공인 지방대 출신 검사에게 부장 검사가 던지는 뼈 때리는 대사다. 여기서 '뼈'는 은유법이 아니라 출신학교와 집안을 의미하는 직유법이다. 특히 학연은 혈연, 지연과 함께 세상을 움직이는 3대 네트워크의 핵심이다. AI가 세상을 바꾸고 모든 스펙이 데이터화 되는 21세기에 뭔 헛소리? 하실 수 있겠다.
불행히도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한 이래 한 번의 예외 없이 작동했던 법칙이다. 혹자는 한 발 물러서서, 인정은 하지만 한국 사회는 유독 심하다고 토를 단다. 역시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덜 노골적인 나라가 한국이다. 선배 찬스에서 미국 동부 그룹(Eastern Establishment)은 거의 마피아다.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아이비리그에서 실력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집안과 출신 학교만 본다. 그 외 '기타'에게는 면접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고대 로마에서도 작동했던 학연
흔히 학연의 형성기를 근현대라고 말한다. 전혀 아니다. 고금으로 학연은 보편이다. 싸움 못하는 옥타비아누스를 위해 카이사르가 전쟁 천재 아그리파를 붙여주었다는 이야기는 로마사史에서 정설처럼 통한다. 거짓말이다. 옥타비아누스가 무(武)에 취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보강을 위한 양아버지의 배려 같은 건 없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다만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오른팔이 아그리파였다면 왼팔은 '옥타비아누스의 괴벨스'라 불린 마이케나스다. 선전, 선동 총책이었던 그는 시인과 작가들을 동원해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했다. 오늘날 예술가를 후원하는 명칭인 메세나가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마이케나스 역시 옥타비아누스의 고등학교 후배다. 로마 제정(帝政)을 연 3인방을 엮어준 건 아폴로니아라는 학교였던 것이다.
◇지금은 초라하지만 한때 학연 왕국이었던 K1
KS는 한국산업표준을 의미하지만 고교 평준화가 시행되기 전에는 '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출신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였다.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당시 경기고 한 학년이 대략 1100명 정도였는데 해마다 평균 300명 이상, 심지어 1970년에는 졸업생의 81.8%가 서울대에 진학했다. 이 정도면 세상 어느 방향으로 쓰러져도 든든한 학연이 기다리고 있다.
실패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려운 인생인 것이다. 평준화 시행 직전인 1973년 문제적 인물 하나가 경기고에 입학한다. 그의 이름은 노회찬이었다. 졸업은 못했다. 유신 반대 운동으로 제적된 뒤 검정고시로 고려대에 입학했는데 이후 노동 현장으로 직행했다. 사적인 자리에서 역시 지방 명문고 출신인 이용훈 대법원장이 노회찬에게 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경기고 나온 사람이 왜 노동운동을 해?" 국회의원 시절인 2005년 그는 이른바 '떡값 검사' 명단을 공개하면서 검찰의 공적이 된다. 엘리트 검사들을 떡값이나 받아먹는 비리집단으로 전락시킨 대가는 컸다. 게다가 명단에 등장하는 검사들 중 상당수가 경기고 동문이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얻으려는 학연이라는 노다지를 그는 발로 뻥 차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매우 미심쩍은 이유로 의원직을 잃었다.
◇진보의 세속화 전략을 주문하면서도 스스로는 고지식했던 남자
사적으로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2010년 서울시장 후보로 나왔을 때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다룰 수 있는 서울'을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그거야 말로 정말 강남 8학군 부르주아다운 발상 아니냐는 다소 고약한 질문이다. 악기 하나를 제대로 만지려면 10년은 걸린다. 연주에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까지 담으려면 플러스 최소 5년이니 밥벌이에 허덕이는 대부분의 인민들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비꼴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나 역시도 그런 세상을 원하니까. 짐작컨대 그는 좋아했던 모교 교훈인 '자유인·문화인·평화인' 정신에 따라 그저 '미래의 어떤 좋은 날'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지난 7월 23일은 그가 세상을 버린 날이다. 비정상적인 경로로 받은 돈에 대한 책임을 그는 죽음으로 갚았다. 진보는 도덕에 더 엄격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가 한편으로 답답하고 한편으로 안쓰럽고 최종적으로는 그립다. 도둑질에 가깝게 해 먹고도 태연하게 정치질을 하고 있는 인간들을 볼 때마다 그의 고지식한 얼굴이 생각난다.* K1은 경기고등학교를 지칭하는 관가 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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