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걷다 보면 우연처럼 보이지만, 유독 마음이 오래 머무는 공간이 있다. 도시 한복판에서 마주한 풍경이 과거의 기억을 흔들어 깨울 때, 데자뷔처럼 되살아나는 감정은 그곳을 나만의 '장소'로 만든다. 최근 집 근처 박물관의 특별전 '사람과 땅, 지리지에 담다'는 이런 생각을 더욱 선명하게 했다. 지리지에 남겨진 노동의 결, 풍수·지리서에 기록된 삶의 방식은 정보가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과 마음이 켜켜이 쌓인 흔적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공간 속에서 살아가지만, 모든 공간이 '장소'가 되지는 않는다. 장소란 물리적 좌표를 넘어 무엇인가가 깃들고 머무는 감각의 집합이다. 공간은 의미를 품는 순간 비로소 장소가 된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고유한 분위기와 정서, 시간의 층위가 배어 있다. 이를 '장소의 혼(Genius Loci·지니어스 로사이)'이라 부른다.
'지니어스 로사이'는 로마 신화에서 유래한 말로, 땅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특정한 장소에 깃든 정령을 뜻한다. 현대에는 환경계획의 중요한 개념으로 확장되어 '공간의 정체성', '장소의 고유한 성격'을 지칭한다. 그래서 장소 만들기(placemaking)는 기능적 구조를 세우는 데 머물지 않는다. 공간을 해석하고, 삶의 양식을 담고, 그 장소가 지닌 시간과 정서를 존중하는 과정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를 '세계-내-거주함'이라 설명했다. 이는 머무는 공간을 확보하는 차원을 넘어 세계 속에서 정서적·문화적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는 뜻이다. 사람과 세계를 잇는 가교로서의 공간을 만드는 일, 그것이 장소 만들기다.
그러나 도시 개발의 언어 안에서는 이러한 감각이 자주 사라진다. 효율·기능·수익·편의가 앞설수록 장소의 혼은 희미해진다. 그럼에도 사람은 본능적으로 장소의 정서를 갈망한다. 감정이 비어 있는 공간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이는 없다. 작은 공원의 모퉁이, 오래된 골목, 그늘진 벤치가 주는 안도감은 배치의 문제가 아니라 머무를 수 있는 분위기와 관계를 불러오는 온기의 문제다.
사람과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삶의 장면이 쌓이고 기억이 스며든 곳만이 진정한 '우리의 장소'가 된다. 거주를 넘어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 주변 환경과 의미 있게 연결되는 방식. 머문다는 것은 곧 관계를 만드는 일이며, 그 밀도가 깊어질수록 공간은 장소로 변한다. 스쳐 지나가는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가 자라고 정서가 머무는 장소가 된다. 도시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도 바로 그것이다. 공간은 언제든 만들 수 있지만, 장소는 삶의 결이 스며들 때 비로소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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