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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만나는 약선(藥膳)] 효심의 사리꽃, 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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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강회
미나리 강회

미나리 숨소리를 듣는다. 얼음장 아래 아랫도리 주저앉히고 추위를 견딘, 이파리 손끝에 닿으면 봄이 꿈틀거린다. 푸른 물이 뚝뚝 흐른다.

'미나리'는 순우리말 이름이다. 미나리의 '미'는 '물'을 뜻한다. 인천의 옛 이름 '미추홀'은 '물의 고을'이며, 미역, 미더덕 등의 첫음절도 '물'을 말한다. 미+나리=물에서 자라는 나리(나물, 풀)인 거다.

'고려사' 후비(后妃)열전에 고려 제15대 숙종의 왕비인 순종현비와 미나리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친정이 풍비박산나자 왕비는 궁 안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왕비는 어려운 생활을 하는 어머니를 위해 미나리 반찬(근선芹膳)을 정성껏 준비하여 보냈다. '미나리는 사철 푸르르 맛이 좋은데, 우리 집안은 어찌하여 이리도 빨리 시드는가'

고려의 참요(讖謠)인 '사리꽃 노래'는 '권력은 무상하나 효심은 지극하다'라는 메시지로 퍼져나갔다. 미나리 줄기가 길게 뻗으며 엉키는 모습을 국수사리로 보았고, 꽃이 피면 꽃송이가 하얀 실 사리를 풀어놓은 듯하여 사리꽃이라 하였다.

조선 시대 기록물속의 미나리는 단순한 채소를 넘어 효심, 충성심, 그리고 민중의 삶을 상징하는 소재로 등장한다. 미나리 절임인 '근저(芹菹)'는 국가 의례에 필수 제수로 올려졌고, 채소 중 특이하게 '회'로 만들어 임금의 수라상에 올랐다. 맹물로 끓인 백비탕에 미나리를 데쳐서, 익힌 육류나 어류를 돌돌 말아 초장에 찍어 먹는 '미나리강회'가 그것이다.

미나리와 삼겹살
미나리와 삼겹살

또한 '장다리는 한철이고 미나리는 사철일세' 노래로 저잣거리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조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성이 '민'이었다. 노랫말 속의 장다리는 장희빈이었고, 미나리는 궁에서 쫓겨난 민비를 빗댄 거였다. 한철 장다리인 장희빈은 사약을 받았고 사철 미나리인 민비는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시경(詩經)'의 '사락반수 박채기근(思樂泮水 薄采其芹)'은 중국 최상위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감싸 도는 '반수'에서 미나리를 캐듯 인재를 발굴한다는 뜻이다. 태학을 반궁(泮宮)이라 하였는데, 조선에서도 성균관을 둘러싼 연못을 반수라 하였으며, 성균관을 미나리 궁전인, '근궁(芹宮)', 또는 '반궁(泮宮)'이라 칭했다. 반촌(泮村)은 성균관 살림을 돌보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 미근동(渼芹洞)은 미나리꽝이 있던 동네였다.

과거 선비들은 미나리의 세 가지 덕목을 칭송했다. 가뭄에 시들지 않는 강인함, 더러운 물에서 자라나도 청결함, 주변의 물을 맑게 해주는 상생을 '삼근(三芹)'이라 했다. 생명력과 번영의 상징으로 붉은 실로 묶은 미나리를 아기 돌상에 차렸고, 처가 세배는 미나리강회 먹을 때 간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몸을 이롭게 하는 채소였다. 주변에 흔한 미나리지만 귀하게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미나리는 맛이 맵고 달며, 성질은 서늘하다. 열을 내리고 부기를 가라앉히는 작용을 한다. 독특한 향은 식욕을 돋우며 위를 튼튼하게 한다. 미나리가 복어 독인 테트로도톡신을 해독한다는 것은 속설일 뿐,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맛과 영양 면에서 복어와 잘 어울리는 초록의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요즘 하우스 미나리가 한창이다. 미나리는 대구권 지역 특산물로 인기가 높다. 청도와 경산, 팔공산과 화원 등이 미나리 군락지로 이름을 떨친다. 아니나 다를까, 동창 모임에서 미나리 파티를 한다는 전갈이다. 달성군 화원 쪽은 오랜만에 걸음 하였다. 그쪽에 살던 절친이 몇 해 전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친구는 미나리 철마다 어김없이 초대하여 고기와 미나리를 차렸다. 마지막 코스로 양은 냄비에 라면과 동량으로 미나리를 넣어, 소위 미나리탕을 끓여서 먹으라고 권했다. 친구는 가고 없으나 푸릇했던 그 자리, 그 친구의 향기는 알싸하게 남아 코끝을 아리게 한다.

겨울날 따스한 볕을 임 계신 곳에 비추고자/ 봄 미나리 살찐 맛을 임에게 드리고자/ 임이야 무엇이 없으랴마는 못다 드리워 안타까워하노라 –청구영언

노정희 대구한의대 푸드케어약선학과 외래교수
노정희 대구한의대 푸드케어약선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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