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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호 칼럼] 익명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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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호 전 부장판사, 동대구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황현호 전 부장판사
황현호 전 부장판사

민주주의 사회의 핵심 가치는 국민의 알 권리와 공권력의 책임성이다.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과 기관은 국민의 감시를 받을 수 있어야 하며, 그 과정은 가능한 한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최근 들어 각종 정보를 비공개로 전환하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개인정보 보호라는 명분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공적 영역까지 과도한 비공개가 확산되면서 민주주의의 기반인 책임성과 투명성이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각종 단체 소속 회원이나 수혜자 명단의 비공개이다. 전교조 소속 교사의 명단 공개 논란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나 공개되지 않고 있다. 교사는 공립은 물론 사립학교 교원도 국가로부터 급여를 전액 받고 있으므로 공적인 신분이고 이들로 구성된 전교조 명단도 공개를 해야 책임있는 자세가 된다. 5·18 민주유공자 역시 국가로부터 매월 일정액을 받고 있는 공인이므로 그 명단은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떳떳하다.

그 이외에도 범죄의 피해자들이 관련 사건 공범의 형사처벌 결과를 고지 받는 것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각종 선거의 투표지에 해당 투표구의 선거관리위원장 도장을 날인하도록 공직선거법이 규정하고 있음에도 실제는 투표지를 만들 때부터 날인을 인쇄해서 사용한다. 이것도 투표지의 투명성을 해치는 일이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과거에는 공개되던 정보마저 비공개로 전환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행정기관에 설치되어 있는 행정심판위원회는 교수, 변호사, 전문직, 전·현직 고위 공무원 등 전문가들이 심판관으로 참여하여 행정처분에 의해 피해를 입은 국민의 권리구제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과거에는 행정심판 재결서에 심판관의 성명이 기재되었지만, 수년 전부터는 이름이 삭제되고 결정 주문과 이유만 기재되는 경우가 일반화되었다. 국민은 누가 자신의 사건을 심리하고 판단했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행정기관의 집무실 모습도 비슷하다. 과거에는 관공서 출입구나 사무실 앞에서 담당 공무원의 이름과 직위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조직도만 게시하고 담당자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민원인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알기 어렵고, 공직자 역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업무를 수행한다는 책임의식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 이러한 흐름이 계속된다면 장차 다른 공적 문서에서도 담당자의 실명이 점차 사라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판사의 판결문에 과거에는 인쇄된 담당 판사의 이름에다 자필사인을 하였지만 요즘은 인쇄로 갈음한다. 법정에서 재판진행 안내문에 과거에는 담당판사의 이름을 기재하였는데 지금은 담당부의 표시만 하고 판사의 이름을 빼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개인정보 보호는 현대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국민의 권한을 제한하거나 공권력을 행사하는 공적 업무까지 지나치게 비공개하는 것은 개인정보 보호와는 다른 문제이다. 공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은 그 권한에 상응하는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권한은 결국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된다.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사업용 거래계좌 제도, 대중교통 운전기사 실명 표시, 은행창구직원 실명 표시와 같이 사적 영역에서는 투명성이 강화되는데 공적인 영역에서 후퇴하는 것은 시정되어야 한다.

공공분야에서 익명성이 확대되면 행정의 책임 소재는 불분명해진다. 책임이 희미해질수록 잘못된 결정에 대한 견제도 어려워지고, 국민의 감시 기능도 약화된다. 이는 행정의 효율성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늘날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등에서 펼쳐지는 익명성도 심각한 역기능이 있다. 자기의 실명을 스스로 닉네임으로 바꾸면 신원 노출을 피할 수 있다. 익명을 이용한 악성 댓글, 근거 없는 루머 유포, 혐오 표현 등이 일상화되면서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사회적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다.

민주주의의 적은 노골적인 탄압을 하는 독재만이 아니다. 국민이 행정 담당자를 알 수 없게 만들고, 책임 추궁을 어렵게 하는 것도 민주주의를 약화시킨다. 개인정보 보호와 공적 책임은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공권력을 행사하는 영역에서는 국민의 알 권리와 투명성이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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