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에 이어 일본도 생산거점 후보로 검토하며 해외 투자 보폭을 넓히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 확대와 각국의 현지 투자 압박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이다. 전력·용수와 부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국내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 구상과는 대조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31일 일본 내 반도체 합작공장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 참석을 위해 일본 센다이를 방문한 최 회장은 이날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급증하는 AI 수요에 대응하고 생산비용을 낮추기 위한 방안으로 일본 내 메모리 반도체 합작공장의 타당성을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일본 전역을 살펴보고 있다. 전력과 용수가 풍부한 곳이라면 어디든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잠재적 파트너나 구체적인 후보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기도 한 그는 앞서 열린 행사에서 "지금이야말로 한국과 일본이 경제 블록을 형성할 때"라고 강조했다.
일본 공장 검토는 현지 고객사·협력사와의 연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과 맞닿아 있다. SK하이닉스는 베인캐피털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을 통해 일본 낸드플래시 기업 키옥시아 지분 14%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최고경영자(CEO)도 최근 "고객 및 협력업체와 함께 낸드플래시 시장을 공동 개발할 수 있는 방안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SK그룹이 일본 내 반도체 합작공장 설립을 검토하는 것은 생산비용 절감뿐 아니라 현지 고객사·협력사와의 연계를 강화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보조금 정책과 안정적인 전력·용수 공급 여건도 투자 매력을 높이는 요인이다.
실제 일본에는 반도체 소재·장비 기업인 나믹스와 도쿄일렉트론을 비롯해 소니그룹, 닌텐도 등 주요 고객사가 포진해 있다. 일본 정부 역시 대규모 보조금을 앞세워 대만 TSMC 등 해외 반도체 기업의 생산시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미국 현지 생산거점 확충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7일(현지시각)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서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어드밴스드 패키징 공장 기공식을 열었다. 총 38억7천만달러(약 5조3천억원) 이상을 투자해 AI 메모리 후공정 생산시설과 연구개발(R&D) 시설을 구축한다.
삼성전자도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370억달러(약 51조원) 이상을 투입해 파운드리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있다. 핵심 생산거점인 테일러 1공장은 연내 가동을 목표로 막바지 준비에 들어갔다. 올해 말에는 2공장을 착공해 2030년 양산에 나설 계획이며, 1.4나노미터(㎚) 첨단 공정 증설도 추진한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해외 생산거점 확보에 나선 배경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통상 압박이 자리하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지난 7월 마이크론 생산시설 행사 등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직접 거론하며 미국 내 메모리 반도체 공장 건설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국내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뒤 미국 정부의 현지 생산 요구가 더욱 거세졌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빅테크 고객사와의 접근성을 높이려는 실리적 판단도 깔려 있다. 현지 생산거점을 확보하면 고객사와 가까운 곳에서 제품을 공급하고 공동 연구와 인력 교류를 확대할 수 있다. 창신메모리(CXMT), 양쯔메모리(YMTC) 등 중국 기업의 추격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맞춤형 HBM을 비롯한 고부가가치 제품을 선제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해외 투자가 속도를 내는 것과 달리 국내에서 추진되는 800조원 규모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는 전력·용수 공급과 부지 기반시설 구축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최 회장이 일본 공장 후보지의 첫 번째 조건으로 '전력과 용수'를 꼽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클러스터가 기업 투자를 실제로 끌어내려면 선언적인 투자 규모를 넘어 전력·용수와 교통망 등 기반시설 구축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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