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는 지난해 11월 만료된 전주한옥마을의 국제슬로시티 인증을 다시 신청하지 않았다. 5년마다 받아야 하는 재인증을 상업화 문제로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다. 서울 종로구는 북촌 한옥 밀집지의 방문 시간을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로 묶고 어기면 과태료를 물린다. 이름난 한옥촌이 몸살을 앓는 사이, 올가을 발길은 흙돌담 사이로 감나무가 익어가는 전국의 가을 돌담길 마을로 향한다.
◆ 전주가 내려놓은 '느린 도시'
전주한옥마을의 주민등록 인구는 2015년 1316명에서 2024년 10월 841명으로 줄었다. 열 해 사이 세 명 중 한 명 넘게 마을을 떠난 셈이다. 같은 기간 연간 관광객은 2015년 965만 명에서 2023년 1536만 명으로 불었다.
북촌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종로구가 특별관리지역으로 묶은 레드존 안 건축물은 열에 여덟 가까이가 주거용이다. 관광객이 몰린 곳이 사실은 사람이 사는 동네라는 뜻이다. 한양대의 한 관광학부 겸임교수는 한옥마을이 유명해지면 생활 편의점은 줄고 카페와 기념품점이 난립해 원주민 물가와 정주 여건이 나빠진다고 지적한다.
국제슬로시티연맹 인증을 유지하는 국내 지자체는 현재 15곳이다. 전주가 빠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돌담과 고택, 그리고 주민의 일상이 그대로 남은 마을들이다.
◆ 군위 한밤마을, 홍수가 남긴 6.5km 돌담
팔공산 북쪽 분지에 자리한 대구 군위 부계면 대율리 한밤마을은 '내륙의 제주도'로 불린다. 마을 골목을 잇는 자연석 돌담의 전체 길이가 약 6.5km에 이른다. 1930년 경오년 대홍수 때 떠내려온 강돌을 주민들이 거둬 담을 쌓고, 집집마다 감나무와 산수유를 심은 것이 지금의 풍경이 됐다.
돌담은 미로처럼 얽혀 있다. 군위군이 꼽는 핵심 탐방 동선은 약 4km 구간이다. 마을 한가운데 대청은 1632년 중창된 건물로 대구시 유형문화유산이다. 관광용으로 꾸민 담이 아니라 농사짓는 집의 울타리여서 가을이면 담 너머로 감이 주렁주렁 넘어온다.
◆ 담양 삼지내마을, 아시아 첫 슬로시티
전남 담양 창평면 삼지내마을은 2007년 신안·완도와 함께 아시아에서 처음 국제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1510년경 형성된 마을에 지금도 177세대가 산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인 옛 담장은 모나지 않은 화강석과 점토를 번갈아 쌓은 토석담으로, 총길이 3.6km다.
면사무소마저 한옥이다. 담양군 창평슬로시티위원회는 대규모 상업시설 유입을 억제하고 쌀엿과 장아찌 같은 슬로푸드를 지키고 있다. 백진강으로 흘러드는 세 갈래 물길 사이, 담장 위로 가을 감나무가 늘어선다.
◆ 산청 남사예담촌, 620년 감나무가 서 있는 골목
경남 산청 남사예담촌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다. 황토와 강돌을 섞어 어른 키를 훌쩍 넘게 쌓은 흙돌담이 약 3.2km 이어지며, 이 담장 역시 국가등록문화유산이다. 사양정사 맞은편에는 수령 약 620년으로 전해지는 하씨고가 감나무가 서 있다. 두 그루가 X자로 얽힌 부부 회화나무도 이 마을의 얼굴이다.
산청군은 주민 자율 관리로 골목의 고요함을 지킨다. 10월 말이면 처마 밑에 주홍빛 감타래가 걸린다. 거창 황산마을의 토석담 1.2km도 같은 날 등록문화유산이 된 경남권의 또 다른 돌담길이다.
◆ 아산 외암마을과 고성 왕곡마을
충남 아산 외암민속마을은 예안 이씨 집성촌으로 초가와 기와집이 한데 어우러진 국가민속문화유산이다. 고택과 초가를 두른 돌담길이 5.3km에 이른다. 마침 이날부터 사흘간 제25회 짚풀문화제가 열린다. 전국 짚풀공예 공모전 전시와 조선시대 과거 '온양별시' 재연이 이어지고, 아산시는 임시주차장과 연계한 무료 셔틀을 운행한다.
강원권에서는 고성 왕곡마을이 북방식 한옥 50여 채와 가을 억새, 감나무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부여 반교마을은 밭에서 골라낸 막돌로 쌓은 산촌 돌담이 특징이다. 성주 한개마을과 영주 무섬마을도 경북의 고택 마을로 꼽힌다.
◆ 7만원 할인 받고, 대문은 열지 않기
정부는 비수도권 숙박을 최대 7만 원 깎아주는 가을 숙박세일 페스타를 진행 중이다. 2박 이상 14만 원 넘게 결제하면 할인이 적용되고 입실은 11월 8일까지다. 한국관광공사 세이프스테이에 등록된 숙소 중 한옥은 657곳으로 과반을 차지한다. 올 4월 기준 영업 중인 전국 한옥체험업소는 2994곳이며, 지난해 새로 문을 연 곳만 341곳으로 전년보다 100곳 가까이 늘었다.
빠른 증가 뒤에는 그늘도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옥체험업소가 급증하면서 원형 훼손과 소방·위생 안전 기준 미비 문제가 불거졌다고 본다. 더 큰 문제는 담 안쪽이다. 담양군과 산청군 관광부서는 돌담길이 실제 주민 거주지인 만큼 사진을 찍으려 사유지 대문을 열거나 소음을 내는 행위가 사생활 침해 민원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가을 행락철 주차난도 해마다 되풀이된다.
전주가 재인증을 포기한 슬로시티의 조건은 상업화를 막고 주민의 삶을 지키는 것이다. 15곳의 인증 마을이 다음 재심사에서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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