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EBS 강연에서 "굳이 대학 졸업장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점 잘 받는 우등생을 훌륭한 학생으로 여겨온 관행이 산업시대의 유물이라는 지적, 하나의 틀로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이 AI 시대에는 통하기 어렵다는 진단은 대학이 겸허히 들어야 할 비판이다. 다만 '졸업장이 필요 없다'에서 '대학이 필요 없다'는 주장 이전에 기술 변화가 사회에 무엇을 요구해 왔는지 역사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 장면은 1811년 영국이다. 방직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긴다고 믿은 직조공들이 기계를 부수기 시작했고, 러다이트 운동은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흔히 기술에 대한 무지의 소동으로 기억되지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를 '폭동을 통한 단체교섭'이라 불렀다. 쟁점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기계가 낳은 이익과 비용을 누가 짊어지느냐였다. 직물 산업 전체가 일자리를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수작업 직조공의 시대는 저물었고, 전환기에 숙련을 잃은 세대는 수십 년간 생활고를 견뎌야 했다. 승패를 가른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전환기를 건널 역량을 사회가 어떻게 길러내느냐였다. 산업사회가 이후 교육을 넓혀온 배경의 하나다.
두 번째 장면은 1930년이다. 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즈는 에세이 '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에서 100년 뒤에는 기술 발전 덕분에 인류가 주 15시간만 일하게 될 것이라 내다봤다. 부의 증가는 그의 예측에 근접했으나 노동시간 단축은 빗나갔다.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사람들은 여가 대신 더 많은 소비와 새로운 욕구를 택했고, 늘어난 생산성의 열매를 어떻게 나눌지는 기술이 아니라 제도와 가치가 정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이 말한 'AI를 쓰면 한두 시간이면 생산성을 맞출 수 있다'는 전망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기술이 가능성을 열어도 그것이 현실이 되는 방식은 사회가 선택한다. 케인즈 스스로도 인류의 영원한 숙제는 경제적 근심에서 풀려난 자유를 어떻게 현명하게 쓸 것인가가 되리라 보았다. 이는 대학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오래 붙들어온 질문이다.
세 번째 장면은 20세기 후반이다. 컴퓨터가 사무실에 들어오면 종이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는 '종이 없는 사무실'의 전망이 쏟아졌다. 현실은 달랐다. 컴퓨터와 프린터가 보급된 뒤에도 사무실의 종이 소비는 오히려 늘었다. 애비게일 셀런과 리처드 하퍼는 2002년 저서 '종이 없는 사무실의 신화'에서 그 이유를 밝혔다. 사람들은 정보를 보관하려고 종이를 쓴 것이 아니라, 읽고 메모하고 서로 확인하고 합의하는 데 종이가 쓸모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비용은 낮아져도 정보를 이해하고 신뢰하며 함께 결정하는 인간의 일은 쉽게 대체되지 않았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대학은 지식을 건네주는 창구이기 이전에, 지식의 진위를 따지고 서로의 논리를 검증하며 합의를 만들어가는 공동체다. AI가 답을 즉시 내놓는 시대일수록 그 답이 옳은지 가려내고 책임질 사람이 더 필요하다.
그렇다고 대학이 지금 모습 그대로 옳다는 뜻은 아니다. 학점 경쟁과 간판 중심의 서열, 하나의 형식에 맞춘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 학교가 '배우는 곳'에서 '실험하는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문도 타당하다. 그러나 실험에도 방법과 윤리와 이론이 필요하다. 그 토대를 쌓는 곳이 대학이고, 시장이 당장 값을 매기지 않는 기초학문과 장기적 연구를 이어가는 곳도 대학이다. AI가 노동과 복지, 교육, 지역사회를 어떻게 바꾸는지 묻고 제도를 설계하는 일 또한 대학의 몫이다. 특히 지역에서 대학은 청년이 지식과 공동체를 만나는 핵심 공공 기반이다. 졸업장의 값어치는 흔들릴 수 있어도, 이 기반이 흔들리면 지역의 미래도 함께 흔들린다.
러다이트는 기계가 일자리를 모두 앗아갈 것이라 두려워했고, 컴퓨터로 인해 사무실에서 종이가 곧 사라질 것이라 했으며, 케인즈는 노동이 한가로울 만큼 줄어들 것이라 했다. 세 예측 모두 기술의 힘은 짚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제도의 선택은 헤아리지 못했다. AI 시대에 대학이 필요한 이유는 AI를 가르칠 수 있어서가 아니다. AI가 답하지 못하는 질문, 무엇을 위해 쓰고 누구와 나눌 것인가를 함께 묻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졸업장은 몰라도, 대학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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