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국문시가 100년대 민란 구심점

1800년대 민난의 주도층은 가사의 역할을 신뢰하였으며, 민중은 이들을 매개체로 충분히 교감하며 격발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계명대 최미정교수(국문학)는 생곡논총 제24집에 게재한 {1800년대의 민란과국문시가}라는 논문에서 19세기에 {장연작변}(1804) {홍경내난}(1811) {청주괘서사건}(1826) {거창민요}(1836) {진주민난}(1862)등이 일어났을 때 국문시가는 실재하는 현실적인 힘이었으나 이들은 현실의 무력에 대항할 수 없는 무력성으로 쇠퇴했으며 그 잔재조차 남기지 않았다고 강조했다.최교수는 당시 가사가 근본적으로 미래의 자유와 복지를 겨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미래와 상관없는 현실 고발에 치중, 민요가 평정된 이후에도 눈앞의 모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 가사가 유포될 근거를 갖지 못해 우리 문학사에 전승되지 못한 채 {일회성}으로 끝나고 말았다고 밝혔다.

소모의 역할을 하였던 가사들이 현실에 대한 고발 기능뿐만 아니라 미래에대하여 더 큰 용기를 약속하고 삶의 고달픔을 더 확실한 가능성으로서 따뜻하게 위로하는 내용이었다면 난의 실패이후에도 돌려보거나 간직할 수 있었을것이라고 최교수는 분석했다.

그러나 민중의 의견을 대변하여 지배적인 인상만을 전하는 민요는 결말구조가 자유롭게 변할 수 있는 열려진 형식이어서 지속되고 있다. 홍경래란에서의짧은 동요는 홍경래난의 진행방향을 암시해주는 것으로, 동학난에서의 {가보세/가보세/을미적 을미적/병신되면 못간다}하는 노래도 동학난이 갑오년에 시작되어 병신년에 끝날 것을 예언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교수는 1800년대 민란시대는 우리말과 글의 효용가치를 극대화시킨 기회였으나 현실과 작품의 엄청난 괴리가 이 작품들의 소유난 전사를 의미없게 하였으며, 결국은 가사가 전혀 남지 않기에 이른 것이라고 밝히며, 자료가 거의없다고 하여 이 시기를 민중의식이 쇠퇴한 시기로 파악하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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