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아버지 처가

친구 집에 전화를 했다. 당사자는 부재중이고 아들이 전화를 받으면서 [아버지 처가에 갔습니다]고 부친의 부재를 알려 주었다.자식의 위치에서 외가라는 말이 통상적인 올바른 표현임에도 굳이 {아버지처가}라는 완곡한 표현에 어리둥절하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지만, 웬지 그집아들의 심보가 괘씸하다는 생각과 함께 쓰리디 쓰린 단절의 아픔을 느꼈다.언어 질서가 파괴되어 가고 있는 혼돈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버지 처가}란 말은 명확하게 뜻을 전달하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니었을까 두둔해 보았지만, 뼈속에 스며드는 시린 단절의 아픔을 감당할 수 없었다.언어는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다. 우리라는 공동운명체 의식이 없어진 가정은상상만 해도 오싹한 현기증을 느낀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분망하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구실로 가정을 {물 없는 연못}으로 만들어 놓고 물을 채워야 된다는 엄연한 사실은 망각한채 그 규모의 확장과 치장에만 급급한 나머지 참된 행복의 터전은상실당하고 있지 않는지 되돌아 보아야겠다.

가정은 사람답게 되기 위한 배움의 장이 되어야 함에도 가정교육은 팽개치거나 아예 포기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공교육에 전가해 왔다.사랑과 모범으로 가정교육의 근본을 삼을때 자신과 부모를 단절시키는 {아버지 처가}라는 표현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버지 처가}라는 그 말은 나에게도 올바르게 행동하고 올바른 사랑으로 자식 교육을 시키라는 충고로 들려진다.

풍부한 수확을 얻으려면 가장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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