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무대에서의 한국유도의 성장과정에 대해 전문가들은 일본과의 대결양상에따라 크게 세단계로 구분한다.한국선수들이 세계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한 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는 일본과 현격한 실력차를 느끼며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던 시기.이후 70년대말까지 꾸준한 국제대회 참가로 실력이 상승한 한국유도는 쉽사리 꺾이지 않는 승부근성을 보이며 일본을 따라잡기 시작한다.8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유도는 괄목할 정도로 성장, 유도종주국을 자처하던일본유도를 곳곳에서 꺾으며 명성을 높여나갔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등 각종 대회에서 한국은 일본의 최고강적으로 떠올랐고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일본유도의 벽으로 등장한다.이러한 한국유도의 성장기마다 향토선수들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60년대 초반 세계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한 향토출신 윤복균 신창식 윤수균 윤공화 등은 일본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기술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는다.이들의 지도아래 실력을 쌓은 이상식 김대룡 등은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국제무대에서 일본선수들과 접전을 벌이며 한국유도를 한단계 발전시킨다.선배들의 축적된 노력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이경근 안병근 김재엽 이병주등은 마침내 세계무대에서 일본을 꺾고 향토유도의 명성을 세계무대까지 떨친다.
여기서 한국유도발전의 중간기인 70년대 후반의 향토유도를 언급하면서 가장주목해야할 선수가 바로 이상식이다.
이상식은 향토유도의 요람으로 꼽히는 중앙중학교에서 유도를 시작했다.선수발굴과 지도에 탁월한 역량을 갖춘 한상봉선생의 가르침 아래 그의 실력은 급속도로 성장, 중2때인 68년 3월 경북유도회 월례정기시합에서 우승을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상식은 당시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 서서히 과거의 명성을되찾아가는 계성고로 진학한다.
1학년때인 70년 그는 이상태 이재천 이영종 등 뛰어난 선배들의 활약을 보며전국체전우승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고 그때의 감격은 유도에 열정을 불태우는 계기가 된다.
이상식의 주특기는 안뒤축에 이은 왼쪽업어치기.
고1때 연습도중 오른팔을 다친 그는 어쩔수없이 왼쪽업어치기를 익혔지만 오른쪽 수비에만 익숙한 상대선수들을 오히려 손쉽게 메칠수 있었다.전화위복이랄까. 이상식은 안뒤축과 왼쪽업어치기를 적절히 구사, 2학년부터고교졸업때까지 무패를 기록했다.
그의 맹활약에 힘입어 계성고는 73년까지 전국체전 4연패라는 놀라운 기록을세우는 등 고교유도를 휩쓸며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가 고3이던 72년에 일어난 얘기 한도막.
4월 대구실내체육관에서 벌어진 전국중고연맹전에서 계성은 준결승에서 서울의 유도명문 경신을 만난다.
2대2 마지막 대장전에 이상식이 출전, 경신의 구회영(현 경기대유도감독)과맞붙게 돼 경기장은 흥분에 휩싸였다.
경기는 일대접전끝에 무승부.
전교생의 응원을 한몸에 받던 이상식은 심지뽑기에서 져 계성은 결국 3위에머물고 말았다.
곧이어 5월 연세대총장기대회에서 이상식은 그때의 억울함을 똑같이 복수했다.
역시 준결승 대장전에서 만난 경신의 구회영과 무승부끝에 심지뽑기에서 이기고 여세를 몰아 우승을 차지해버린 것.
그는 아침부터 배가 아파 진찰을 받으니 맹장염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경기나 끝내고 보자며 참고 출전해 심지뽑기에서 복수를 하고나니 배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어요. 물론 나중에 수술은 받았지요 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영남대로 진학한 이상식은 운동에 몰두하지 못하고 방황하기도 했지만 다시연습에 전념,대학4학년때인 76년 전국대학생 개인체급별대회 71kg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77년 운동선수들을 뽑아 훈련시키던 수도경비사령부에 입대, 이상식은 유도에전념하며 실력을 쌓아간다.
국가대표선수가 되겠다는 각오로 연습에만 매달렸지요. 입대6개월만에 마침내 대표선수로 뽑혔고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대회에 출전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이후 이상식은 2년여동안 국가대표선발전에서 무패의 기록을 남겼을 뿐만아니라 국제무대에서도 향토유도의 명성을 드높였다.
78년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군인유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그는 그해11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세계대학생유도선수권 대회서도 3위를차지하는 등 국제대회입상기록을 세워나갔다.
다음해인 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1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한이상식은 역시 향토출신인 곽우종과 함께 은메달을 차지함으로써 한국유도가세계정상을 정복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했다.
세계무대에서 자신감을 가진 이상식은 연습에 연습을 계속하지만 그의 희망이던 80년 모스크바올림픽 출전이 무산됨에 따라 현역을 떠나 지도자의 길로들어서게 된다.
84년부터 86아시아대회까지 대표팀코치를 맡은 이상식은 그후 모교인 계성고유도부를 맡아 후진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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