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50년 해외기획취재 시리즈-의용대 월북

당시 한적한 시골 약산 김원봉 계열이 중경에 완전히 안착한 것은 40년3월이었다. 당원과 가족들은 거의가 먼저 도착해 있었으나, 조선의용대가 이때중경으로 이동을 완료한것이었다. 계림에서 만17개월을 주둔한 뒤였다.백범선생측은시가지에서 남쪽으로 70여㎞떨어진 기강(기강)을중경 첫발판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약산계열이 터전으로 삼은 곳은 보다 중경에 가까운 탄자석(탄자석) 지역이었다.중경의 중심가는 긴 고구마 꼴의 반도(반도) 모양이다. 서쪽을 길게 흐르다 남쪽으로 감아도는 양자강과, 동쪽을 흐르다 양자강과 합류하는 가릉강(가릉강) 사이에 형성된 지역이 그것이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시중구'가핵심이다.

하지만 약산 계열이 자리 잡은 탄자석은 이 중심지구 밖이었다. 아예 양자강 건너였다. 그래서 중경 시가지를 양자강 너머 북으로 바라보는 곳이었다. 행정구역명칭도 '남안구(남안구)'였다.

지금 이 일대는 제법 시가화돼 있다. 그러나 당시엔 한적한 시골이었을것이다. 전쟁으로 중국의 임시 수도가 되기 전만 하더라도 중경 자체가 작은도시에불과했기 때문이다. 중경 중심부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지금도 찻길로 40리를 넘으니 당시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불과1~2㎞밖에 안떨어져 있지만, 중경엔 양자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한개 밖에 없어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떠돌이 이방인에겐 시가 중심지라는 곳조차 범접하기 쉽잖은 곳이었나 싶었다.

현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적지는 현재의 남안구 토산향 홍성촌 조보마을40호와 남안구 묘배타(묘배타)81호 일대 옛 '손가화원'터 등이었다.그 중 옛 손가화원에는 먼저 도착한 백범의 어머니 곽락원여사와 백범의주치의 유진동선생 가족이 살기도 했었다. 곽낙사는 여기서 세상을 떠났다.유지사둘째부인으로 현지에 생존해 있는 중국인 황방여사(74)는 "넓은 장원이어서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이 섞여 살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화원'이라는 것이 저택을 의미하는 만큼 규모가 엄청났을 터였다.이 터는 황여사의 며느리가 손수 안내해 줬다. 역시 중국인인 그녀는 일대에 들어선 마직(마직)공장 옆의 '사천성 저비(저비)물자 관리국 물자공사'라는 창고 및아파트 지구를 당시의 손가화원이라고 지목했다. 현재 유지사의 두 아들과 며느리 등 3명이 아직 부근에 살면서 옛터 바로 옆 가죽공장에 다니고 있다고도 했다.이에비해 조보마을은 여전히 전형적 산촌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높은 직위를 갖고 있다는 이소심여사가 이곳에서의용대원이던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고 증언한 바있다는 것이 취재 자문역김희곤교수의 설명이었다.

북 연안파 초석돼

이렇게 약산 계열이 중경으로 진입할 즈음은 그러나 그의 조선의용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의용대의 대부분이 '월북'하는 것이다. 그 뒤 약산은 입장이 약화돼 행보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또 '월북자'들은 나중 북한정부 수립 때 소위 '연안파'라는 세력을 형성하는기반이 된다. 그래서 이때의 일이 우리 민족사에서 중요한 한 사건이 되는것이다.

조선의용대가 중국군에 배속돼 활동한 기간은 대략 2년쯤이었다. 그러다이들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중국군에 배속돼 선무공작이나하고 있는 것이 과연 만족할만한 것인가"하는 회의가 그 시발이었다. 독자적으로 전투하는 군대가 되자는 의식이 싹텄던 것이다.

전투를 하려면 전방으로 가야 했다. 자신들이 배치돼 있던 곳도 전방이었지만, 사정이 꼭 그런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중국 정부군과 일본군 사이의 중일전쟁은 38년도 무한 함락 이후 거의 정체 상태에 들어갔다. 그 후 일본군은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 이간 작전을 채택, 국민당군과는 거의 전투를 않고 공산군과 주로 접전하는 양상이었다는 것이다.당시 공산군은 주로 황하 이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황하가 전후방의 갈림선인 셈이었다.

그래서 조선의용대가 결의한 것이 황하 이북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또 일본군내 한국인 징집병도 급증하고 있어, 끌어들여 부대 확장하기에 좋은 조건이기도 했다. 당시 의용대의 한지성이 발표한 글에 따르면 중국동북지방에는 한국인이 이미 1백20만에 달했고, 북경.천진 등 화북지역에도20여만명이나 되며, 앞으로도 70여만명이 더 이주할 전망이었다.황하를 넘는 통로는 낙양이었다.

의용대 본부와 3개 지대 중 1개 지대는 이미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었고,나머지 2개 지대는 이곳으로 와야 도강할 수 있었다. 이들이 낙양 집결을 실천한 것은 40년3~10월 사이, 임시정부 광복군이 막 창설을 준비하던 즈음이었다. 이어 이곳에서 겨울을 보낸 의용대는 41년3~5월 사이에 4개 그룹으로나뉘어 강을 건넜다. 3백명이 넘던 의용대원 중 본부대 등의 50여명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월북에 참가했다.

이들의 '월북'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진짜 월북이 되고 말았다. 처음엔 태항산맥을 무대로 활동을 벌이기도 하지만, 끝내 중국 공산당 산하 군대가 되고 만 것이다. 점차 의용대 본부와의 연결도 끊겨, 부대 지휘권은 중국공산군 소속의 무정에게 장악됐다. 이름 역시 조선의용군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어 42년도에는 김두봉선생이 뒤따라 '월북'했다. 부산 동래 출신으로 당시 53세이던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주시경선생의 제자로서 우리 말글을 지켜야 한다며 '조선말본'을 저술하고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해 임정의 사료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어 상해의 교포학교(인성학교) 교장으로서 32년도까지 8년을 일했으며, 최초의 우리 사전을 저술하기도 했다.**김두봉 주석취임**

그러던 그가 왜 '월북'했는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어쨌든 그가 합류한 뒤 연안에서는 '독립동맹'이라는 것이 결성되고 그가 주석에 취임한다. 이 동맹은 나중 북한에서 '조선신민당'이 됐다가 공산당과 합당해 북한 노동당이 된다.

말하자면 중국 국민당 지원 아래 우리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존재했듯이,공산당 지원 아래에는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있게 되는 것이다. 동맹은김두봉이 이끌고 의용군은 무정이 지휘하는 형태였다. 의용군은 광복 직전엔2천명 규모로까지 커졌으며, 북한으로의 귀국을 앞둔 45년11월에는 8만명에이르렀다는 연구가 있다. 일본군 탈출 한국인과 현지 젊은이 등이 계속 입대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규모가커지자 북한 입국이 소련군에 의해 저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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