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화가 심해진 내 몸은 온몸이 게껍데기처럼 발갛게 부어올랐고, 두달동안 잠을 못자는 불면증이계속됐다. 남부서에 근무하던 남편(李晉出.67)이 새벽 세시, 네시까지 간병하느라 곁에 붙어 있었다. 몸에 좋다는 당근주스니, 콩죽이니 하는 것을 끓여서 병원에 갖다주었으나 치수가 올라가는것으로 봐서 심상찮았다. 병원에서는 조직검사를 하자고 하였으나 거부하고 입원한지 보름만에퇴원했다.
정년을 네달앞둔 남편이 84년 2월에 사표를 냈다. 혼자 병수발을 하던 남편이 "도저히 불쌍해서안되겠다. 며느리 수발이라도 받고 가야하지 않겠느냐"면서 사표를 던져버렸다.30년이상 다닌 경찰공무원의 당시 퇴직금이 2천4백만원. 집한채도 못살 돈이었고, 그저 전세나 들면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돈을 다 써도 큰 병원에 보여야겠다며 부득부득 서울 아들네로 병든 나를 데리고 갔다.
병문안을 오는 사람마다, 그렇게 고생끝에 낙도 못보고 죽느냐고, 세상이 야속하기도하다며 눈물을 보였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내가 상심해서 울면 상대방에게 아픔을 더 줄것 같아서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있으니 그동안 살아온 내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18세, 어린나이에 맏며느리로 시집왔다. 시집에는 젖먹이에서부터 올망졸망한 시동생 시누이가 6명이나 있었다. 7남매 맏며느리로 시집가는 저에게 친정오빠는 '참을 인(忍)'자를 써주며 어려워도 참고 견디면 고생은 끝이 있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오빠가 써준 '忍'자는 이미 내 가슴에 새겨져있고, 남편의 가슴에도 새겨져 있다.
시집이 갑작스레 몰락한 후 몇편의 드라마가 될 수 있는 고난과 슬픔을 겪을때마다 참을 인자를되뇌이면서 살아왔다고나 할까. 남편은 결혼하고 곧 군에 들어가버렸다. 혼자서 만삭이 된 나는출산일을 며칠 앞두고 눈내린 팔조령을 넘어서 1백리도 넘는 길을 한밤중에 뒹굴듯이 걸어서 친정으로 갔다. 출산의 고통은 컸지만 첫 아들을 얻은 기쁨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도 남았다.군대간 남편이 보고싶을 새도 없이 아들은 쑥쑥 자라고, 시동생 시누이들도 제비새끼처럼 나만쳐다보고 있었다. 남편은 군에 갔다가 휴전회담이 진행중이던 해에 재징집이 돼 다시 군에 복무하게 됐다. 남편은 지리산전투에 투입됐으며 남편이 군대가고 없는 8년동안 아들 하나만 보고 생활했다.
그런데 일곱살바기 아들이 갑자기 급성 폐렴에 걸렸다. 연세드신 시부모들 하고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데 품안의 아들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병원에 데리고 갈 여유가없었다. 아들은 애처롭게 숨을 헐떡이다가 죄없는 눈망울만 굴리다가 내품에서 숨졌다.그렇게 아들을 버린 후, 두달동안 사경을 헤맸다. 심장병이 생겼고, 온갖 잔병,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병치레를 해보지 않은게 없을 정도로 크고 잔병들이 덤벼들었다.
그때 병장이던 남편은 졸병신분인채, 부대에서 인정을 받아 병약한 나를 데리고 관사생활을 했다.연세가 높으신 시부모, 시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져 수족을 못쓰면서도 매일 새벽 기도를 가야했다. 아침마다 시어머니를 교회에 모셔갔고, 그렇게 하기를 4년째, 시어머니가 타계했다.한번 역경의 파도가 몰려와 이겨내고 나면 또다시 거센 파도가 몰아쳤다. 굽이굽이 어려움만 겪다가 아직 내 세상이라고 할만한 세월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간경화라니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경찰공무원과 결혼해서 남의 돈을 바라지않고, 오직 월급만으로 생활하다보니 이사한 횟수만 44번. 신천동에 살때는 우리도 쌀 한됫박씩 사먹는 처지이면서도 이웃할머니를 3년간 거두었다. 보리쌀도 주고, 쌀도 주고, 미역도 넣어주고하니 죽으려고 하던 사람들이 새로 살아났다. 결코 돈이있어서 나누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가난을, 우리의 아픔을, 우리의 배고픔을 나누었다.곳곳마다 불쌍한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포항 경주 영덕 영해… 자주 이사다니느라 진득이 한동네에 살 겨를도 없었지만 잠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지금도 전화오고 찾아온다.큰아이를 그렇게 버리고 또 아들(이은국.41.시사영어사 부장, 경희대 강사), 딸(이영선.37.효정학원원장)이 태어났다. 우리 아이 둘을 키우기도 벅찼지만 이웃과 함께 나누며 착하게, 인정스레 살아왔는데, 어느날 갑자기 죽을 목숨이라니 운명을 거부하고 싶었다.
남편에게 부정한 돈을 벌어오라고 한 적이 한번도 없는 나는 늘 아이들에게 깨끗한 가난이 뭔지를 가르쳤고, 항상 "너희는 깨끗한 돈으로만 살았다"고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남들 밥먹을때 죽먹으면 되고, 쟤들만 열심히 키우면 되니 절대로 남의 돈 탐내지 마세요. 우야든지 저거들만 커놓으면 큰소리치고, 두발 뻗고 자겠지요"하면서 남편이 어려운 살림에 신경쓰지않아도 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틈틈이 뜨개질을 해서 큰장에 갖다팔고, 양키시장에 버선을 갖다댄 돈으로 반찬을 샀다. 아이들도 착해서 이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때까지 그렇게 공부를 잘했던 아이들이 "엄마가 너무 힘든다"며 나란히 전문학교에 간다고 했을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예 대학교에 떨어졌다고 거짓 아닌 거짓말을 둘러댄 것을 뒤늦게 알고, 내 가슴은 미어지는 것같았다. 이렇게 이웃에 폐끼치지 않고, 인정스레, 사람사는 낙을 찾아 살던 내가 54세에 앓게된간경화는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었다.
이런 증세로 몸이 아프기는 이보다 10여년전, 40대의 일이었다. 소화가 안되고, 음식을 못 먹자간호사로 있던 동생이 대학병원에서 간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병원에서는 이미 간이 굳어서 경화가 됐다고 했다.
아들딸을 제대로 키워서 영광을 보아야지 하면서 소박하게 모든 것 참아온 내 인생, 옆사람에게짜증 한번 내본적 없는 내 인생을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이제껏 남편과 40년을 해로하면서 한번도 큰소리를 내본 적도, 부부싸움을 한 적도 없었는데, 내가 이렇게 몹쓸 병에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었다. 젊은 시절, 남편이 이상한 눈치가보여도 그걸 표를 내지 않고 다 수용을 했고, 영민한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부부싸움에 마음의상처를 입을까봐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참고 살았는데 간경화라니, 두달밖에 못 산다니…중앙상고 옆에서 살때 내 별명은 오목이 엄마였다. 딸이 오목오목하게 예쁘게 생겼다고 붙여진별명이었다. 20년전에 잠깐 이웃에 산 사람이라도 어디서나 오목이 엄마 하면서 찾아와서 놀고가고, 시장통에 나가서도 몸이 불편한 할머니가 계시면 대소변 볼 일을 다 봐드리고, 여름날이면동네 할머니들하고 우무 한그릇이라도 나눠먹고, 그게 고마워서 여름날 호박잎도 갖다주고 이렇게 인정을 베풀고 살았는데, 이제 두어달 뒤면 죽을 목숨이라니…
문병온 사람들이 다 슬퍼서 눈물지어도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절대 안죽는다"오히려 큰소리쳤다.
남편이 평생 다닌 경찰서에 사표를 던지고, 서울 아들네로 같이 올라오기전 팔공산에 가서 굿을했다. 두달 넘게 달아났던 잠이 오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어떤 것이 무섭지도, 더럽지도 않았다. 서울 아들집에서 내손으로토룡탕을 끓여서 마셨고, 온갖 좋다는 민간요법은 미친듯이 다 해본 어느날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다. 씻은듯이, 거짓말처럼 간경화가 나으면서 심장병도, 온갖 잔병도 다 나았다. 서울 간지 일주일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모두들 기적이라고 했다. 서울에 있으니 대구서 함께 살던 친지형제들 생각이 나고, 고향이 그리웠다. 모든 살림살이를 서울에 두고, 임시로 대구에 다시 내려왔다. 대구에 내려오니 딸이 소일삼아 일을 시작해보라고 권했다. 딸의 직장상사가 퇴직하고 만화방을 하는데 괜찮다고 자꾸 권했다.
남편의 퇴직금으로 지금의 만화방을 인수받았다. 만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음란물, 폭력물 천지였다. 이런것을 두고 보지 못하는 남편이 건전하지 못한 불량 만화는 추려내어 불살라버렸다. 만화방의 만화가 반으로 확줄어들었다. 만화방 밖에는 미성년자 출입금지라고 써붙이고, 불량만화는발을 못붙이게 했다.
처음 만화방을 인수할때만 해도 학생들의 출입이 잦았다. 내 아들 딸보다 더 어린 그네들이 어디정붙일데가 없는 것을 보면 안타까웠다. 어떤 학생은 학교 가기 싫어서 오기도 했고, 시험에 낙방하고 집은 나왔는데 갈 곳이 없어서 하릴없이 찾아온 학생도 있었다. 잠시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어서 그렇지 대부분 걔네들은 본성이 착했다. 설득하면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다. 자주 오는 애들에게는 인사도 시킨다.
스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하고 있다. 우리 만화방에는 말썽많은 일본 폭력만화나 선정적인 외설만화, 해적판 만화는 일절 취급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취급하지 않으니 돈을 벌 리 만무하지만 아무 돈이나 버는게 내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조금이라도 희고 깨끗한 돈, 사회적으로 지탄받지 않는 돈을 버는게 내 목표이고, 이 만화방은 내 건강관리를 위한 소일터이다. 이곳을 찾아오는청소년들은 이제 인사를 곧잘 한다.
"복순이는 키도 크고 예쁘구마는 인사를 잘했으면 더 좋겠다"고 했더니 다음날부터 "할머니, 안녕하세요"를 입에 달고 다닌다. 요즘은 청소년들보다 퇴근길 회사원들이 만화를 많이 빌려간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만화를 보면서 풀게 된다고 하고, 한 회사원은 만화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게 됐다고도 하며, 또다른 학생은 시험문제를 만화덕에 풀었다고 하니 유익한 면도 있는셈이다.
퇴직하고 재가 병이 낫자 불의를 못참는 남편은 청소년 선도를 자처하고 나섰다. 집앞에 침을 함부로 뱉거나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은 다시 줍게 만든다. 경로석에 앉아있는 학생이나젊은 사람들은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도록 시킨다. 젊은 시절, 내가 당당하게 살았는데 주눅들어서 살 필요가 없다는 신조이다. 만화방에 다니는 사람들을 성씨별로 분류하여 신용유무와 부모의 친절성등을 적어두고 참고하고 있으며 "있소?" "없소?"하는 말투를 "있습니까" "없습니까"로바꾸어가고 있다. 가끔씩 학교에 가기싫어하는 학생이 눈에 띄면 조용히 말을 건네서 "학생은 장차 큰일을 할 사람같은데 출세할 사람에게는 항상 중단하고픈 마음이 생기는 장애물이 따른단다.이 고비를 넘기는 사람만이 마지막 성공을 하는 법"이라고 타일러 학교로 보내면 얼마뒤 "열심히학교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하면서 희망찬 모습으로 찾아와 우리를 즐겁게 한다. 내가 만화방을하지 않았다면 그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게 아닌가.
기적처럼 소생한 후 다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면, 우리 사회에는 자기분야에서 말없이 과욕부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을 얕보려는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봄의 진달래, 가을의 국화향이 다르듯이 모든 분야와 업종에는 각기 다른 특성과 효능이 있다. 청소년 문제를 요란하게 거론하기는 해도 아무도 진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벗고 실천하는 사람은 눈닦고 찾아보아도없다.
"죽음의 문턱에서 마음덕으로 살아났다"고도 하고 "부처님 뒤따라가다 길잃은 사람"이라고도 하는 저는 덤으로 사는 인생노정의 한부분이나마 끝없이 솟아나는 인정을 나누면서 향기가 넘치는세상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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