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영남기행(4)-고향이 변한다

고향. 좋은 이름이다. 옛 친구, 그 야트막 했던 뒷산, 두 다리 사이 거꾸로 머리 박고 바라 보던여름밤의 은하수, 모깃불 피우고 옹기종기 어른들 얘기 듣던 바깥마당, 그렇게 넓어 보이던 신작로, 그리고 어머니….

이제 많은 사람들이 30년 타향살이를 끝내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어째?오랜 세월 뒤의 그 고향이 달라져 있다면?

취재팀은 우선 벼농사 지역을 찾아 보기로 했다. 닿은 곳은 의성 안계들. 경북지역 4대 평야 중하나. 5천여 농가를 품은 2천만평 들녘. 공지사항을 확성기로 알리는 면 사무소 방송이 "아, 참으로 농촌이구나" 싶게 했다.

망정산을 배경으로 기러기떼가 겨울철 풍경을 그려내는 곳. 그 아래 넉넉한 들판 곳곳에서 이른아침인데도 볏짚 거두는 농부들이 드문드문 채색을 보태고 있었다.

군 농업기술센터 백인환(52) 소장은 여기서 자라 이곳 농업을 책임지고 있는 벼농사 분야 증인이었다.

"30여년 전에는 논 15마지기면 웬만한 집은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더러는 명문 집안을 꿈꾸며자식들 중 하나 정도는 대학에 보낼 엄두도 냈지요. 이런 집도 열집 중 하나 될까 말까 했어요"이 넓은 안계들에서도 거의가 논 10마지기 이하 농가였다는 얘기. 쌀 한 가마(80kg)에 3천원, 공무원 초임이 1만3천원, 한달 하숙비가 쌀 한가마 값 정도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변했지요" 이부분에서 백소장은 적잖이 실망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계산을 해 볼까? 대충 잡아 논 한마지기(200평)에서 나는 벼는 많아야 40말 정도. 20마지기농사를 짓는다면 800말 쯤 된다.

이를 쌀로 찧으면 절반인 400말 가량. 5말이 한가마이니 80가마 정도 되는 셈. 그리고 이를 지금시세로 환산하면 전액 1천200여만원. 노동비는커녕 비료값·농약값 조차 빼지 않은 총액이다.그런데도 20마지기 농사 일은 부부와 자녀 등 식구가 한철 내내 안쉬고 일해야 겨우 해낼 분량이다.

더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려면 남의 논을 당겨 부쳐야 하고 그만큼 일의 양이나 임차료 부담이늘어난다. 쉽게 풀자면, 벼농사를 어지간히 지어서는 연간 소득이 1천만원을 넘기기 힘들다는 계산. 백소장은 논 15마지기 기준 소득을 600만원 정도로 계산해 냈다.

"도시 근로자들이 혼자 벌어 연간 2천만∼3천만원의 소득을 올리는 것과 비교해 보십시오. 논을70마지기는 부쳐야 비슷한 소득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일년에 5∼6개월 일하는 쌀농사특성을 감안 하더라도 얼추 50마지기는 있어야 연 2천만원 소득이 가능 하잖겠습니까"들판에서 만난 농부 이병일(60)씨는 가축 사료로 팔기 위해 갈고리로 볏짚을 끌어 모으다 말고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농사만 지어 8남매를 키웠다는 그는 자기 논 20마지기에다 30마지기의 빌린 논을 엎쳐 작년에 생산한 벼가 40kg 들이 매상 포대로 150가마밖에 안됐다고 했다. 폭우로 생산량마저 절반으로 준 것.

"여기다 마지기당 기계 모심기 삯이 1만5천원, 베는 삯이 2만원이나 돼요. 뭣이 남겠습니까?" 객토작업을 나온 중기업자 조덕준(48)씨 역시 "건설 경기가 바닥이라 빌려줬던 논 9마지기라도 되받아 다시 농사를 시작해야 할 판"이라면서도 표정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인면 덕지리 정석조(39)씨는 달랐다. 그는 160마지기(3만2천평)의 벼농사꾼. 조부(86)가평생 일군 2만평 논을 물려 받고 자신이 1만2천평을 더 불려 부인(35)과 단둘이서 그 많은 일을모두 해 낸다고 했다. 현대판 천석꾼. 그러면서 소 30마리를 키운다고 했다.

"일년 벼 수확량이 매상 포대(40kg)로 2천 가마쯤 됩니다. 재작년엔 순수익만 1억원 가량 됐습니다" 트랙터·이앙기·건조기 등 일반 농기계는 물론 땅 고르는 최신형 레이저 균평기까지 갖추니연간 영농비도 2천500만원 정도면 해결되더라고 했다. '규모의 농업'으로 이룬 성공. 그 비결을정씨는 경기도 화성군 한국농업대에서 한달 두번의 특강으로 전파한다고 했다.

그랬다. 우리 쌀 농사는 달라져 있었다. 적어도 50마지기 이상은 농사 지어야 하고, 가능하면 100마지기 이상 부쳐야 '중산층' 농군이 될 수 있는 시대 깊숙이 우리는 이미 들어서 있는 것이다.

이런 대단위 벼농사를 위해 모 키우기를 대신 맡아주는 '육묘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거둔 벼의 건조·저장 등을 대신해 주는 '종합처리장'이 늘어나는 것도 그 뒷받침을 위한 것이었다.

쌀농사가 달라진 또다른 한 모습은 다인농협 정상태(52) 조합장이 실감시켜 줬다. "벼 농사도 이제 양이나 질 둘 중 하나로 승부해야 합니다. 전에 같이는 안되지요" 앞에서 살핀 160마지기 농사꾼이 양으로 성공한 경우라면, 정조합장이 강조하려는 것은 질 부문이었다.

그는 친환경적 조건에서 생산된 고급 미질(米質)의 '저농약쌀'과 고급 브랜드를 얘기했다. 다인농협 미곡 종합처리장이 지향하는 것도 이 방향이었다. 하루 8시간 가동으로 20kg들이 쌀 2천500포대를 처리하는 이 공장은 도내 35개 RPC(종합처리 공장) 중 흑자를 내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 품질 인증쌀 '다인 어진쌀'이 비결이라고 했다. 대구시내 연간 쌀 소비량의 30%를 충당하고있을 정도라는 얘기.

무기염류를 많이 함유한 황토 논에서 비료·농약을 50% 적게 써 재배한 저공해 '황토쌀'을 올해중 시범 생산할 예정인 의성군 농업기술센터의 시도도 이런 질 중심의 벼농사 전환 예였다.취재 마지막날 오전 취재팀은 다인면 사무소를 지나다 영농 설계교육에 참가 중인 170여명의 농민을 만났다. 거의 50대 중반은 넘은듯한 이들의 강의 듣는 표정은 어떤 학자도 따를 수 없을만큼 진지해 보였다.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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