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1세기를 향해 (15)과제와 전망-좌담

매일신문과 대구사회연구소가 공동기획한 '21세기를 향해' 시리즈를 마치며 전문가 좌담회를 마련했다. 새 천년을 앞둔 세기말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21세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준비를 해나가야 할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본다.

〈편집자주〉

▲권기홍 교수='21세기를 향해'라는 제목으로 매일신문과 대구사회연구소가 공동기획물을 연재해봤습니다. 21세기를 앞둔 시점에서 미래 사회를 전망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간추려보자는 의도였는데요.

▲이진우 교수=세기말에 인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상당히 체계적으로 짚은 좋은 기획이었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의 지도'를 그려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다고 봅니다.

▲기미야 다다시 교수=일본 신문들은 20세기를 정리하는 회고적인 기획이 많은데 21세기를 내다보는 미래지향적인 기획이라는 측면에서 대조적인 것 같습니다. 특히 정보화라는 말이 많이 나와 일본보다 정보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권=21세기 사회는 경제체제쪽을 보더라도 긍정적·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물적 자본의 중요성이 줄고 인적 자본, 즉 인간이 더욱 중요한 생산요소로 바뀌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일종의 시장만능주의, 무한경쟁의 세계화시대라는 것이 의미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도 그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국제금융자본의 전면적인 지배체제가 21세기 세계경제질서를 대변하는 키워드가 된다면 대단히 우려스럽습니다.

▲이=개인적으로 세계화, 정보화, 민주화가 21세기의 화두가 될 것으로 봅니다. 앞으로 민주화문제는 단일국가체제 안에서 권력의 분배를 통제하는 차원을 넘어 국가와 국가간 관계, 전세계적 차원에서 논의될 것입니다. 21세기에 세계화와 정보화, 다시 말해 경제지배와 기술주의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을 어느 정도 수정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전세계적 의미에서의 민주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미야=세계화, 정보화가 민주화에 미치는 영향은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많이 있지만 갈등적인 모순된 부분도 많습니다. 정보화문제를 보더라도 정보화사회에서는 정보권력을 가진 일부 사람들의 엘리트적인 지배구조가 강화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민주화는 당위성을 가진 추세이기도 하지만, 역시 인간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권=20세기는 노동시간 단축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산업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노동시간의 단축은 동질의 노동 분배를 통해 여러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었습니다. 21세기에도 이같은 잡 쉐어링이 가능할지, 그렇지 않다면 실업문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을텐데요.

▲이=21세기에 정보를 어느 정도 독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지식노동자 계층과 정보를 전혀 획득할 수 없는 단순 서비스 노동자로 사회가 양극화되는 현상은 어쩔 수 없는 귀결인 것 같습니다. 자연히 잡 쉐어링이 가능한 영역도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21세기에 중요한 문제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의미있는 노동, 일하면서도 보람을 느끼는 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는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하는 사회보장정책을 시행하고 대다수 시민은 자원봉사나 공동체에 기여하는 무보수 노동으로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권=보수를 바라는 전통적 의미의 노동이 아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거리를 사회가 많이 제공하고 그 일거리를 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식의 전환이 확산돼야 한다는 이야기인데요. 이것이 가능하다면 일로부터 보수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존 보장 측면에서 21세기 국가는 20세기 국가보다 복지국가적인 모습을 더 많이 갖출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문제는 자원봉사와 같은 무보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생계 유지 재원이 마련돼야 하는 것인데요. 이런 측면에서 국가의 역할이 지금 신자유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최소의 정부, 최소의 국가는 관료제의 살빼기 차원에서는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국가가 담당해야할 역할과 기능은 21세기에 더 강화되지 않겠나 여겨집니다. 지금까지는 경제가 정치를 좌지우지해왔는데 21세기에는 오히려 정치가 다시 경제의 방향을 조절해주는,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향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봅니다.

▲기미야=그러나 지금 선진국가들은 국가의 기능을 시장에 맡기고 스스로 역할을 포기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재 국가 기능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시장과의 관계입니다. 21세기 시장은 20세기 시장보다 훨씬 더 세계화된 단일세계시장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기존의 국가가 충분히 해내지 못했던 것을 시민사회가 감당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시민사회를 좀 더 혁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권=시장과 국가, 시민사회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는 셈인데요. 그렇지 않으면 시장 만능주의, 기술 만능주의에 매몰될 위험이 생길 것입니다.

▲이=경제 위기를 맞으면서 한국의 지식인층 사이에 가장 유행한 말이 '아시아적 가치'였습니다. 소위 동아시아모델이 경제성장모델로서 한계에 부딪힌 것이 증명됐다면 아시아적 가치는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세계화, 정보화, 민주화가 보편적이라면 아시아적 가치, 유가(儒家)적 가치, 우리의 전통문화는 보편적이기라기 보다 특수하고 지엽적인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신자유주의·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적 가치는 과연 계승할 의미가 있는지 등의 문제가 논의돼야 할 것입니다.

▲기미야=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신자유주의적인 패러다임에 잘 적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한국영화쿼터제 지키기 운동과 같이 문화적인 아이덴티티를 고수하려는 양면성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권=양면성이 존재함으로써 고유한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역동적인 21세기 사회에서는 특히 문화영역에서 아시아적 가치가 새롭게 부각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라 하면 기존의 대중, 고급문화로 나누는데 생활문화가 정착단계에 이르면 생활문화 속에 아시아적 가치가 스며들 수 있는 여지가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21세기에 자본주의가 보편화되면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게 됩니다. 과거의 유대성은 깨지고 개인은 파편화돼 결과적으로 정체성의 위기가 올 수밖에 없겠지요. 이를 막기 위해서는 개인의 권리와 인권을 존중하면서도 근본적으로 공동체의 유대성을 고수해야 합니다.

대구도 경제적으로는 열악하지만 유가적인 가치가 뿌리깊게 남아있는 지역입니다. 대구의 보수적·집단적·가부장적인 문화를 부정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생산적인 갈등을 통해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모델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권=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신흥공업국가들은 산업화가 제대로 진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보화를 추진해야 하는 이중고에 직면해 있습니다. 서구유럽이나 미국, 일본 등은 산업화가 거의 완성된 단계에서 탈산업화를 맞는 과도기에 있지만 우리는 산업화와 정보화, 이 두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의 문제가 또다른 고민거리입니다. 대구에서 산업화 측면이 강한 위천공단과 탈산업화 과정의 밀라노 프로젝트가 동시에 추진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로 우리에게 직접 와닿는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기미야=지역 사회의 고민거리를 공유하는 국내외 네트워크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시장의 세계화 추세에 적응하면서 조화를 이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우선 지역 사회에서 여러 관심사에 대한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더 나아가 세계적인 시민사회 네트워크가 이뤄지면 방향을 종잡기 어려운 자본주의 기술문명이 인간적인 모습을 띠도록 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세기에 서양 중심의 세계질서에 다른 하나의 평형축을 형성하기 위해 동북아시아가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은 당위입니다. 시민사회 네트워크는 국가대 국가의 공식적인 관계로 풀기 어려운 동북아 문제들도 바로 잡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정리·金英修기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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