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이화 세상읽기-금강산을 본 감상

필자는 지난 주에 현대문화센터의 초청을 받아 금강산에 다녀왔다. 필자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그동안 우리의 선인들이 무수히 금강산을 다녀와 쓴 기행문과 기행시를 읽어 왔다.

그런 탓으로 남다른 감상을 지니고 금강산 관광길을 떠났다. 더욱이 북한과 정부당국, 현대그룹에서 벌인 금강산 개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입장이어서 그곳으로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봉래호가 새벽에 장전항에 도착할 즈음 잠을 설치다가 일어나서 갑판위로 올라갔다. 이미 많은 동행들이 나와 멀리 장전항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자는 장전항을 꼼꼼히 살펴볼 사이도 없이 먼저 눈물이 왈칵 솟았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밟아보는 북한 땅.

더욱이 그동안 국내.중국 등 수많은 역사기행을 다니면서도 한번도 북한 땅을 밟아 보지 못한 감상이 뒤섞여 나오는 눈물일는지. 나의 감상은 북한의 해관(세관)을 거쳐 온정리를 지나면서 새삼 북받쳐 올랐다. 군데군데 경비를 서고 있는 군인들의 표정은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밭에서 일을 하는 모습도 있었고 마을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여인네의 모습도 보였고 산비탈에서 나물을 뜯는 광경도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버스에서 손을 흔들 적에 같이 흔들어 주는 반응을 보였다. 하루에도 네 차례씩 수십대의 버스가 지나갔으니 일일이 손을 흔들어 호응해 주는 일도 귀찮을 것이다.

마을과 버스가 지나가는 길 중간에는 긴 콘크리트 담장이 뻗어 있었고 마을을 벗어나서는 철조망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곳은 예전부터 배밭으로 유명했는데 배 한그루에 열려있는 꽃송이는 듬성했다.

필자는 마을을 지나면서 내창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들의 찌든 얼굴, 초라한 행색, 경색된 표정만이 누선을 자극한 것이 아니었다.

저 콘크리트담장과 철조망은 또 하나의 작은 삼팔선이었다. 만물상과 구룡폭포의 두 코스에는 북한의 안내원들이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묻는 말에 때로 친절히 일러주지만 어딘지 마음을 터놓고 어울릴 수가 없었다. 서로 몇가지 금기사항을 지키는 것이 예의였고 절제였다.

김정숙휴양소와 현대휴게소 양옆에서는 마침 메이데이 행사의 하나로 노인 젊은이 남자 여자 어린이들이 뒤섞여 춤판이 벌어졌다. 휴게소에 들른 관광객들은 몰려가서 길을 사이에 두고 처음에는 구경을 하다가 나중에는 어울려 춤을 추었다.

양쪽에서 경비를 맡은 사람들은 서로 뒤섞이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 춤판에는 조동걸교수도 열띤 동작을 하며 섞여 있었고 구경꾼으로는 유홍준교수도 착잡한 마음으로 끼어 있었다. 어느 할머니는 "막걸리와 두부 한모도 없이 춤을 추네"라고 중얼거렸다.

유홍준교수는 "음악만 틀어놓아도 춤을 춘대요"라고 대꾸했다. 그곳 할머니들의 옷차림은 꼭 예전 나의 어머니가 나들이에 장농에서 꺼내 입던 인조 치마 저고리였다.

필자는 뒷전으로 나와 건물의 후미진 곳에서 한바탕 울고 말았다. 춤판의 길은 또 하나의 경계였다.

우리 일행은 우리 끼리만 있는 자리에서도 이른바 정치적 발언을 삼갔다. 모처럼 열어놓은 금강산 길을 소중하게 여기고 혹시라도 이를 깨지 않으려는 의지들이 깔려 있는 탓으로 여겨졌다.

다만 휴지를 버리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침을 뱉거나 발을 씻는 따위의 행위로 산을 더럽힐 적에는 몇백 달러의 벌금을 물리는 탓으로 물과 산이 너무 깨끗하다는 말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저기 절벽에 쓰여진 '위대한...'으로 시작하는 글귀를 보고는 외면하거나 귓속말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무엇인지 들뜨지 않고 신중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이 통일의 염원이었다. 우리는 북한동포를 도발해서도 안될 것이요, 쌀 보내는 일을 아까워할 필요도 없었다. 금강산은 바늘구멍만하게 열려있는 통로였다.

이것마저 막혀서는 안될 일이다. 금강산을 깨끗하게 가꾸어 통일조국의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도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일 것이다.

이이화〈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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