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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문화파일-1999년 겨울,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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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버그가 세계를 위협하는 세기말. 좀체 끝이 보이지 않는 지긋지긋한 IMF한파. 우리는 또 다시 겨울로 깊숙이 들어와 앉았다. 1900년대의 마지막, 그 시간의 상징성까지 겹쳐 올 겨울의 수은주는 더욱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더욱 벌어진 빈부격차. 소시민들은 모두 시린 손을 부비며 더욱 낮은 체감온도로 이번 겨울을 나야 한다.

##오랜 물구나무서기에 어지럼

기묘년 한 해 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미 찢겨 나간 달력처럼 추억과 기억이 아물아물하다. 숱한 끔찍한 사건사고와 난장같은 정치판에 국민들은 이제 고역이다. 오랜 물구나무서기에 우리의 경제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게다가 지역간, 계층간, 직종간 대립과 갈등의 혼돈이 우리곁에 비집고 들어와 떠날 줄을 모른다. 실직의 고통을 겪는 동료들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고, 가진 자들의 흥청거림과 공직자들의 비리에 곱지 않은 눈빛을 쏘아붙여야 했다.

수행과 은둔의 조계종은 소송과 폭력으로 얼룩졌고, 한 연예인의 포르노그라피에 우리는 역겨워 해야 했다. 머니게임에 춤추는 코스닥시장의 그래프가 당혹스러웠고, 옷로비 사건을 둘러싼 여인네들의 뻔한 거짓말에 넌더리를 쳐야 했다. 우여곡절의 금강산 여행도 실향민들의 구멍난 가슴을 메우지 못했고, 한 조간신문에 실린 탈북 아이들의 무참히 얻어맞은 얼굴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아름답지 못한 지난 1년의 삶

지난 1년 동안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은 아름답지 못했다. 비록 궁색한 살림살이지만 나보다 못한 이웃을 위해 손을 내밀지 못한 때문이다. 남보다 많이 차지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여야 했고, 거짓과 위선.비양심이라는 두꺼운 방패로 자신을 무장해 왔다.

결식아동들이 점심마저 굶을 때 날마다 성찬으로 몸집을 불려나간 자들은 없었는가. 이웃의 아픔이 나의 행복이 되지는 않았는지 성찰해봐야 한다. 혹여 자리나 권력을 빌미로 선량한 국민을 괴롭히고 힘을 남용하지는 않았는지, 혈세를 빼돌리지는 않았는지, 악의 세력을 비호하지는 않았는지, 부끄러운 돈을 탐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인간다운 21세기 우리의 몫

한 큰 스님의 다비.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우리는 또 다른 번뇌에 잠긴다. 삶이 유한하다면 구도의 정신은 길지 않을까. 진탕 같은 현실에서 모두다 연꽃처럼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어려움과 두려움이 있을까.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생이지만 이제까지의 발걸음을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이제 한 세기를 접는다. 100년의 세월은 우리에게 너무 길고 지루했다. 지나온 세기의 침략과 약탈, 차별의 두터운 구조가 우리의 목줄을 옥죄었다.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큰 전쟁들이 터졌고, 동족상잔의 비극이 이 땅에서도 벌어졌다. 분단은 질기디 질긴 사슬처럼 우리앞에 버티고 있다. 이런 비극을 넘어서 다음 세기에는 공생과 평화, 평등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파괴의 논리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자연과 지구환경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20세기가 폭력의 세기였다면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인간다운 21세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1999년 겨울, 대구. 끝자락이 아니라 새 출발점에 서 있는 우리에게 2000년 경진(庚辰)년의 새 기운이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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