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황사 바람과 함께 왔다. 황사는 시야를 뿌옇게 하고 호흡기를 괴롭혔지만 봄의 찬란함을 이기지는 못했다. 목련이 피고 벚꽃이 만개하고 진달래가 지천이더니, 이팝꽃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한나절 투명한 햇살에도 나뭇잎이 푸르게 살찌는 신록의 계절이다.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울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산과 강 사이에 도시가 있고 마을이 있고 집들이 있다. 그리고 산길 들길 아스팔트 길이 나 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람들,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다.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한껏 쏟아 부을 수 있는 대상이 우리의 집안에 있다. 바로 가족이다.
◈사랑이 있어 아름다운 세상
얼마 전에 '아메리칸 뷰티'란 영화를 감상했다. 거기에는 해체되어 가는 두 가정이 있었다. 마리화나를 피우는가 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햄버거 가게 종업원이 되는 아버지와 잠재된 동성애적 욕망을 엄격한 규범 안게 가둬 놓고 사는 또 한 사람의 아버지, 불륜에 빠지는 한 어머니와 음울하고 황폐한 모습의 또 다른 어머니가 두 가정의 부모들이다. 그들에게는 각각 반항하는 딸과 아들이 있다. 그런 상황을 '강 건너의 불'로 생각하고 싶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있는 오월은 달력에조차 사랑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장한 어버이와 효자 호부의 미담을 소개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찡하게 한다. 하지만 더 이상 '어린이의 날'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 나올 만큼 어린이들이 좋은 환경, 넘치는 보살핌 속에서 자란다는 오늘에도 학대받고 굶주리는 어린이가 없지 않다. 부모님을 극진하게 모시는 자식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외롭다 못해 비참한 노년을 보내는 우리의 부모님들이 적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불이 강을 건너올까 걱정이 된다.
◈해체돼 가는 가정의 소중함
지난해 이맘때쯤 무슨 일로 달성공원에 간 적이 있다. 어깨에 내리는 햇살의 감촉을 느끼며 아주 경쾌한 기분으로 공원에 접어들었는데 한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공원 입구에서부터 그늘이 있는 곳마다 삼삼오오 앉아 계시는 어르신들…,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아서, 무료한 시간이나 보낼까 해서 나오신 것이리라 애써 생각했다. 그런데 초점없는 눈으로 멀거니 허공을 바라보고 계시거나 지나가는 이를 따라 이리저리 눈길을 돌리시는 모습들이 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짐짓 모른 척 할 뿐 우리는 알고 있다, 부모님들이 얼마나 쓸쓸하신 지를. 그리고 우리가 더 모른 척 논감아버린 사실이 또 하나 있다. 지금 어르신들의 그 처연한 고독이 곧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엊그제 부모님 가슴에 달아드린 붉은 카네이션의 꽃말이 '상심'이다. 내가 이미 부모가 되었으니 '상심'이란 말의 의미를 알고도 남는다. 그런데 내 부모님이 나로 인해서 겪으셨을 더 큰 '상심'은 어찌 그리도 잘 잊어버리는지.
◈고단한 영혼 쉴 내 작은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아메리칸 뷰티'가 그린 가정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들에게는 생각만 해도 등이 따습고 배가 부른 집이 있다. 단칸 셋방이든 저택이든 그것은 눈에 보이는 구조물일 뿐이다. 고단한 몸과 상처받은 영혼을 쉬게 하는 형이상학의 집인 가정이 우리에게는 아직 건재하고 있는 것이다.
황사바람이 불어도 봄은 어김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그렇듯이 때로는 서로 공경함과 보살핌이 모자라서 우리의 집에도 그늘이 지곤 하지만 저물 무렵이면 발검음은 또 어김없이 집을 향하게 된다.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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