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처가살이

"좋은 점이 많습니다. 어른이 계시니까 아내와 목소리 높여 싸우는 걸 자제하게 되고, 신혼살림 장만하느라 몫돈 안 들고, 생활비 부담도 줄고…"

결혼 2개월 된 회사원 이영욱(30, 대구시 신암동)씨. 경력은 짧지만 '처가살이 예찬론'이 대단하다. 그는 30대 장남.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안 한다는 처가살이를 홀로 계신 장모를 모시기 위해 시작했다.

고향이 안동이라 어차피 본가 어른을 모실 수 없던 차에 장모를 모시면서 사위 사랑도 듬뿍 안겨드리고 아내 점수 따고 경제적 부담도 더는 등 '일거삼득'의 이점도 있다고 생각됐다. 이런 장남을 두고 본가 부모들도 "이상할 것 없다"고 당연한 일로 받아 들였다.

이씨 같은 경우는 이제 한둘이 아니다. '처가와 뒷간은 멀리 할수록 좋다'는 옛말이 무색해지고 있는 것. 처가에 들어가 사는 걸 자연스레 생각하고, 완전 처가살이는 아니더라도 가까이 살면서 생활권을 같이 하는 남성들 역시 늘고 있다. 대다수 여성들이 시집살이를 꺼리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

생활상을 투영하는 TV 드라마에도 근래 들어 처가살이하는 남성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유형도 각양각색. SBS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의 박영규는 대표적인 '얹혀 살기형'. 무능한 학원강사로 앞에선 핏대를 올리는 다혈질이지만 뒤로는 산부인과 원장인 부자 장인에게서 '떡고물'이나마 얻어볼까 잇속 차리기에 여념이 없다.

'당신은 누구시길래'의 박형준은 극진한 '애처가형'. 맏딸인 아내가 원해서 장인·장모를 모시며 친아들 같이 효도를 다한다. MBC 일일극 '당신 때문에'의 이효정은 생활비 절약, 직장과의 거리 등을 염두에 둔 철저한 '손익 계산형'. 금은방 하는 장인집에 살면서 장모로부터 "생활비 한번 낸 적 없다"는 핀잔을 듣지만 별로 주눅들어 하지 않는다.

최근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20~30대 미혼남성 34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37%가 처가살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부정적인 생각(48.8%)이 더 많았지만, 장남이나 독자인 경우에도 31.8%가 '처가살이를 할 수 있다'는 긍정적 태도를 보여 젊은 남성들의 의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찬성 이유로 '딸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29.4%), '아내의 편의를 위해'(25.4%) 등을 우선적으로 꼽아 처가살이를 아내 중심으로 규정 지으려 했다. 처가살이 때의 생활비 분담 정도에 대해서는 '처가 식구들과 상의해 결정'(52.9%), '눈치껏 적당히'(28.5%), '부부가 쓰는 액수만큼'(10%), '절대 부담하지 않겠다'(2.9%) 순이었다.

가사노동은 '눈치껏 적당히'(58.5%), '솔선수범해서 한다'(22.6%)는 반응.

처가살이는 아니지만 아이 양육문제 등으로 처가 인근에 사는 남성들은 더 흔히 볼 수 있다. 회사원 김동진(37·대구시 지산동)씨는 장모 및 처형 부부와 아파트 같은 동에 살면서 장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식사도 함께 한다. 아이 둘을 키워주고 있는 처가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집을 정한 장남 권재규(35, 대구시 침산동)씨는 본가에서 분가한 뒤 양육문제로 처가 근처로 이사했다.

경북대 신성자 교수(사회복지학)는 "여자의 시집살이는 당연시해도 남자의 처가살이는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회적 터부(금기)가 깨지고 있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고려시대로 거슬러 가보면 남성의 처가살이는 새삼스런 일도 아니라고 했다. 흔히 쓰는 '장가간다'는 말은 '장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처가살이를 의미한다는 것. 남자가 처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계속 살았던 고려시대 결혼 풍속에서 유래한 말이다.

신교수는 "처가살이가 부끄럽게 여겨진 것은 조선시대 가부장적인 유교문화 영향 때문"이라며, "요즘 직장생활과 양육을 병행하는 여성들의 의사결정권이 힘을 얻고 젊은 남성들의 실리주의 추세로 인해 처가살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金英修기자 stel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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