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남북 회담과 연쇄파업

바위에 새겨진 구호를 제외하면 다를 것이 없었다. 설악산 자락을 따라 들어온 느낌, 언어와 자연, 음식문화를 같이 해온 유구한 전통은 빙하기보다 더 엄혹한 냉전기의 분단을 가볍게 뛰어넘고 있었다. 자연의 극치인 금강산과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금강산 관광객들은 분명 복받은 사람들이었다.

금강산 관광과 남북 정상회담으로 녹아내리고 있는 냉전 질서는 아직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실감나지 않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의 축배가 마르기도 전에 병원 파업, 은행 파업, 호텔 폐업, 민영화 반대 구호가 걸려 있는 역사(驛舍)가 금강산 관광객 들의 호사스러움 뒤에 감춰 있는 남한 사회 내부의 균열을 보여준다. 민족 내부의 분열이 가져온 6·25전쟁의 사상자가 10년 이상 끌었던 베트남 전쟁의 사상자 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다시 보아야 할 때다.

민족국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민족 내부의 다양한 주의 주장을 담을 수 있는 공통의 관심, 공통의 이해관계, 공공성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노사정 합의가 가능하여 내부 통합을 이룬 나라는 민족국가의 국민이라는 한 배를 타고 시민권에 걸맞은 교육, 의료 등의 공공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은 물론 민족 문화라는 공통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 반대의 경우는 민족국가의 해체, 공공성의 해체로 나타난다. 국가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파당적 이해에서 벗어났다고 보일 때만 노사정 합의가 가능한 것이 외국의 선례이다. 민족국가는 아직도 개개인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가족과 같은 피난처가 되고 있다. 시민권 없는 사람들, 난민들이 당하는 설움은 고아의 설움에 비길 바가 아닌 것이 냉정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주변국들의 관심은 우리의 관심을 뛰어넘고 있다. 우려에서 나온 관심은 남북의 민족 패권주의의 재현이다. 이미 한국 다국적기업에서 일해 본 아시아의 노동자들은 한반도 민족주의가 가져올 아시아의 또 하나의 패권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일본 모리 총리의 신민론과 그에 맞춰 쓴 '고쿠민 노 렉시 ( 국사)' 책을 무료 보급하고도 베스트 셀러로 과장하고 있는, 파시즘의 향수에 젖는 일본인들도 경쟁적 패권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가장 선의의 관심은 유럽에서 달성한 냉전질서의 해체와 평화문화의 정착을 아시아에도 가능하게 해 보려고 노력하는 아시아의 전쟁피해자들로 부터 나오고 있다. 한반도에서의 냉전 상태의 지속이 바로 아시아에서의 군비증강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G-8정상회담이 열리고 있는 오키나와에서는 미국의 신군사기지 건설 반대운동에 온 주민이 나서고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이 일으킨 세계 제 2차 대전에서 일본 본토인 보다는 오키나와 사람들 또는 한반도 사람들이 어떻게 희생양이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민 투표를 통해 1997년 체결된 미일 안보협약에 따라 이루어지는 신 미군기지 건설을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물론 G-8 정상회담 기간 중에 '만월 축제' '인간사슬 만들기' 등의 주민 행동 계획을 세우고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오키나와에 평화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고군 분투하고 있다.

독일은 전쟁 책임으로 분단당했을 뿐 아니라 50년이 지난 뒤에도 '인생은 아름다워'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의 영화를 통해 전쟁 책임을 추궁당하고 있다. 이들 영화를 만든 감독들이 유태인이라는 것을 공개한다면 그들의 작품성이 훼손당할까? 그에 비해 아시아에서의 전쟁 책임을 묻는 제대로된 영화 한편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나 오에 겐사부로 등의 문호들 조차도 일본이 당한 원폭 피해에 초점을 두는데 그치고 있다. 아시아에서의 전쟁 피해에 대한 가장 분명한 고발은 정신대 할머니들의 줄기찬 목소리를 통해 울리고 있을 뿐이다.

남북 정상회담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식민지시대, 6·25, 냉전기의 잔재를 넘기 위해서는 한반도 평화문화의 정착을 위한 우리 내부의 노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대구가톨릭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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