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수. 47세. 게임기 수입제작업체 AM시스템 대표. 대구 토박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대학을 마칠 때까지 대구에서 살았다. 이어 17년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대구에 내려온지 이제 3년째. 그가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에서 사업을 시작한다고 하자 대구의 유명 섬유업체 서울사무소 사장인 고교친구는 그에게 중요한 '행동지침'을 주었다.
"대구 내려가거든 절대로 튀지말라. 사업이 잘돼도 잘된다 하지말고 조용히 일만 하라"는 충고였다. 그는 이 말을 대구에 내려온 뒤 곧 실감하게 된다. 전자오락실 수준인 지역 게임산업에는 아직 대학출신이 드물다. 이런 터에 대학물을 먹은 그가 서울식 합리주의로 무장한 경영수완을 발휘하자 금세 업계 선두로 뛰어올랐다. 투서가 검찰.경찰.국세청으로 날아들었다. 모두 그를 음해하는 내용이었다. 무혐의 처리됐지만 곤욕을 치렀다.
"능력을 기르고 노력을 보태 공정한 경쟁을 할 생각은 않고 남이 잘되는 게 배아파 해코지한 겁니다. 함께 배고픈 건 참아도 혼자 배아픈 건 못참겠다는 식입니다. 이러고도 대구가 망하지 않은 게 신기해요"
시기.질투에는 사랑보다 자기애(自己愛)가 더 많다는 서양격언이 있다. 대구.경북 사람들의 시기.질투심은 유별나다. 대표적 사례 몇가지만 보자. 지금은 서로 협조하지만 지역 섬유업계의 대표적 두 연구기관은 한 때 치열하게 경쟁했다. 서로 상대를 깎아내리는 불건전 경쟁이었다. 그것도 부족해 좋지않은 말을 서울로 전했다. 주무부처인 산업자원부 관리들은 서울에 앉아서 대구의 온갖 안좋은 소문은 다 들을 수 있었다.
올해 대구상의 회장 선거전도 "너는 안된다. 네가 하면 나도 한다"는 몇몇 지역 경제계 인사들의 시기.질투심의 산물이다. 시기.질투가 남긴 것은 상처뿐인 영광과 깊게 팬 감정의 골. 모 상공의원은 "상의회장 선거로 3개월 동안 회사일을 전혀 못했다"며 "그동안 상공의원들이 제대로 일을 했다면 지역경제가 더 발전했을 것"이라고 뼈있는 한 마디를 했다.
빗나간 시기심은 해외에까지 망신살을 뻗치고 있다. 몇년전 구미의 한 직물업체는 '키위'란 원단을 개발, 야드당 4,5달러를 받고 수출했다. 두바이 등 해외시장에서 이 원단이 인기를 끌자 지역의 중소섬유업체는 물론 대기업까지 비슷한 원단을 만들어 수출, 이 원단값은 절반이하로 떨어졌다. 이러한 지역 섬유직물업계의 베끼기 관행은 제 살뿐 아니라 남의 살도 깎고있다.
지역 유통업계도 이러한 빗나간 시기.질투심의 피해자다. 지역 재력가들이 지역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지 않는 것은 공연히 입방아에 오르는 것이 겁나 아예 다른 사람 눈에 띄지않는 서울지역 백화점으로 가서 쇼핑하고 내려온다는 것이다.
대구.경북사람들이 '미덕'으로 자랑하는 '의리'역시 하루빨리 땅속에 파묻어야 할 유물로 치부되고 있다. 왜 그럴까. '의리'가 위선의 탈을 쓰고 '정의'로 행세하기 때문이다. 정씨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모든 일에 아는 사람을 끼워야 쉽게 해결됐습니다. 당연히 해줘야 할 일도 혼자가면 처리해주지 않아요. 소위 지역 유지란 인물들이 터줏대감 처럼 요소요소에 자리잡고 모두가 자기를 통하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고 합디다. 인맥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요. 대구에서 나고 자란 제가 이럴진대 외지출신이 느끼는 소외감이 어떨지 상상해보세요"
대구가 외지인 거주비율이 가장 낮은 것도 이러한 '패거리 문화' 때문이다. 정씨는 "대구.경북지역 만큼 '계'모임을 좋아하는 곳은 보지못했다"며 "어딜가나 고향과 출신학교를 따진다"고 비판했다. 이런 정씨도 지난 3년간 상당히 '대구화'됐다. 하지만 아직 온전한 '대구사람'이 못되고 있다.
"친구들 조차 저보고 변했다고 해요. 저는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친구들은 이기적인 서울사람을 닮았다는 겁니다. 서울에선 '시간이 곧 돈'이라는 개념이 정착돼있어요. 남의 시간을 뺏으면 큰 피해주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대구에선 중요한 모임에 나가도 대부분 신변잡담으로 일관하다 끝마쳐요"
이러한 '패거리 문화'와 '의리문화'는 대구.경북지역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정씨는 "품질이 떨어지고 값이 비싸도 '의리'상 어쩔 수 없이 아는 사람 물건을 사줘야 했다"고 말한다. '의리'를 저버리면 주변으로부터 비난받고 '왕따'당할 각오를 해야한다는 것.
"건달세계에서나 통용되는 잘못된 '의리문화'는 분명 비합리적 문화입니다. '의리'때문에 흠이 있거나 값비싼 물건을 거래한 뒤 서로 비난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서울 등 외지 사람들은 납품기일을 어길 경우 변상하거나 분명한 이유를 대고 사과합니다. 반면 지역 사람들은 전화 한 통화면 끝이에요. 그것도 잘못에 대한 사과는커녕 뭐 그럴 수도 있지않느냐는 식입니다. 프로의식이 전혀 없어요. 우물안 개구리 의식을 버리지 않으면 지역 발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역에서 타파해야 할 그릇된 또다른 문화는 장유유서(長幼有序) 문화다. 서울 등 다른 지역은 벤처기업외에 각 분야에서 20,30대가 자기 목소리를 당당히 낸다. 반면 지역에선 50대 조차 '어린 애' 취급이다. 2년전 문희갑 시장이 공개적으로 섬유단체장 물갈이론을 전개했을 때 모 섬유단체의 50대 후반 인사 몇몇이 이사장 후보로 거론되자, "아직 어려 맡길 수 없다"며 60대의 이 섬유단체 이사장은 버텼다. 이사장 후보 거론자중 한 명은 "나도 내일 모레면 회갑"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기업뿐 아니라 학문의 전당인 대학사회에서도 장유유서는 엄존한다. 지역대학의 40대 모 교수는 신문과 방송 등에 잇따라 등장, 이름을 알리자 같은 대학내에서 나이 든 교수들의 은근한 견제를 받았다고 전했다. 젊은 사람이 너무 나서지 말라는 것이었다.
유독 지역에서 나이를 많이 따질까. "아마추어리즘이 만연해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프로의식이 없다보니 전문가를 인정하는 풍토가 아닙니다. 그러면 따질 게 나이밖에 더 있습니까. 이래서는 실력있는 젊은 사람들이 지역에 남아있지 않아요" 정씨의 진단이다. 50대 조차 발언권이 없는 사회가 발전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 사고방식으로 지역사회를 이끌려는 욕심을 지역의 장로들은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구.경북은 도태될 뿐이다. 물론 경험과 경륜은 존중돼야 한다. 그렇지만 경험과 경륜이 존중받으려면 젊은층의 패기와 창의력을 짓밟지 않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윌리엄 워즈워드는 "지혜는 몸을 낮출 때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다"고 말했다. 대구.경북인들도 이제 몸을 낮추고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曺永昌기자 cyc1@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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