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송병하씨

"아홉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3대 독자인 저 하나만 믿고 청상과부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온 어머니께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했습니다. 하늘이 두쪽나도 살아 계셔야 합니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때 평생의 한을 풀기위해 꼭 만나야 합니다"

지난 50년을 낯설고 물선 남쪽땅에서 오로지 북의 어머니를 만날 희망 하나로 버텨온 송병하(74·대구시 북구 산격 3동)씨는 27일 이모 김금주(87)씨만의 생존을 확인하고는 통곡을 쏟았다.

송씨는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면서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홀어머니와 두 누이동생의 사망소식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황해도 연백군 송봉면이 고향인 송씨는 당시 24세이던 때 연안 경찰서 순경으로 근무하던 중 전쟁이 터지자 인근 경기도 포천군 비상근무를 위해 아침 집을 나선 것이 생이별의 시작이었다.

가족 사진 한 장 챙기지 못한 채.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고향을 등지고 순식간에 1천 500리길 먼 타향 부산까지 떠밀려 내려왔다.

송씨는 경찰을 그만두고 고향땅에 한 발이라도 가깝게 가기 위해 당시 대구 육군 27 교육대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후 북진때 강화도에 주둔한 미 극동사령부 8240부대에 자원 입대했다. 바로 바다 건너가 고향땅으로 하루에도 수 십번 헤엄쳐 가고 싶었지만 마음뿐, 송씨의 고향행은 거기서 멈춰야만 했다.

한시도 가족을 잊을 수 없어 80년대 이산가족 상봉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북에 남겨둔 가족의 생사를 확인했지만 허사였다.

남쪽에 친 인척 한 명없는 송씨는 현 부인(66)을 만나 결혼한 뒤 보따리장수, 초등학교 급사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 2남 1녀를 키워 살림을 내주고 지하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

"앞으로 얼마를 살겠습니까. 경찰신분때문에 가족의 신변에 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속에서 이모와 이종사촌 동생들의 이름까지 이산가족 명단에 넣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 했습니다. 이모를 만나 홀 어머니와 두 누이동생의 생사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李鍾圭기자 jongk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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