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길 나의 삶-하회별신굿 이상호씨

"양반도 지부랄이라 카고, 선비도 지부랄이라카고…도대체 이 부랄이 뉘 부랄이니껴" 갓 잡은 소 낭심을 머리 위에 쳐들고 관객들에게 익살스런 넉두리를 늘어놓는 하회별신굿탈놀이 백정탈 이상호(李相浩·56)씨. 탈꾼 외길 인생 30년. 하회탈춤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밤을 새도 끝이 없을성 싶다.

"초등학교 3학년때쯤일 겁니다. 하회마을에 놀러갔다 마을애들이 탈을 쓰고 장난치는 걸 봤어요. 그때 처음 본 탈모습이 무척 인상깊었습니다"

어릴 때 그는 공부보다 잡기를 더 좋아하는 못말릴 장난꾸러기였다. 중학교 1학년땐 또래들과 함께 제재소에서 나무를 훔쳐 배를 만들고 이불 호청을 뜯어 돛을 달고 낙동강을 타고 상주까지 내려가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후 군대 다녀온 뒤에는 연극단을 만들어 배우노릇에 몰두했다. 스물여섯되던 해인 1973년, 갓 결혼한 그에게 당시 안동문화원의 유한상 원장이 찾아와 대본을 건네며 하회탈춤을 복원시켜 볼 것을 권했다. 하회별신굿탈놀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1928년 무진년을 마지막으로 맥이 끊겼던 하회별신굿탈놀이. 모두가 잊어버린 탈춤을 50여년만에 복원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르쳐주는 스승도 없고 어떻게 추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일단 지역 문예인 선배들과 하회가면극연구회를 만들어 안동엽연초생산조합 2층 강당을 빌려 연습장을 마련했지요. 하회 주변 풍산·풍천면 잔칫집은 다 찾아다니면서 춤 잘추는 어른들에게 술을 사드려가며 춤사위를 배웠지요"

잔칫집 막춤으로 하회탈춤을 되찾기는 역부족. 하회마을로 갔다. 하회탈춤을 본 적 있는 할머니들의 지적을 받아가며 춤사위를 고쳐나가기 수십번. 그렇지만 매번 "아니야, 그렇게 추지는 않았어"라는 할머니들의 핀잔만 받았을 뿐 제대로 복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 '무진년 마지막 탈꾼'을 찾기로 작정했다. 장돌뱅이가 되기로 했다. 2년여동안 안동 근방 시골 5일장마다 빠짐없이 찾아가 옷가지를 늘어놓고 장꾼들에게 혼자 연구한 하회탈춤을 보여줬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무진년의 그 탈꾼이 나타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탈꾼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사실 그동안 그는 미친 듯이 하회탈춤에 빠져들어갔다. 6·25전쟁통에 빨갱이로 몰려 총살당한 아버지. 어머니가 안동버스터미널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해 그리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지만 사춘기 시절 내내 왜 아버지가 죽어야했는지를 두고 방황했다. 의문은 한으로 가슴에 맺혀 미친 듯이 탈춤에 파묻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사회전체가 보릿고개 탈피와 증산·수출을 위해 달음박질치던 그때 뜬금없이 탈춤에 미친 그는 가정을 내팽개친거나 다름없었고 결국 결혼 4년만에 이혼당하는 처지가 됐다. 탈이 '웬수'처럼 느껴졌다. 다시는 탈을 쓰지 않겠노라 맹세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타고난 '끼'로 성대묘사와 원맨쇼 등을 하며 밤무대 코미디언으로 활동했다. 제법 인기를 끌면서 잠시동안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연예인으로 출세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던 그에게 무진년 탈꾼을 찾았노라는 희소식이 날아왔다. 곧바로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안동으로 내려왔다.

지난 75년, 당시 경안고 교사였던 김수진씨가 무진년 탈꾼 이창희(91년 작고)옹을 찾아낸 것이다. 그토록 찾아헤맨 탈꾼이 눈앞에 나타나자 조상을 다시 만난듯 반가움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탈꾼 이력이 남부끄러워 숨기고 살아왔다는 이옹. 다행히 기억력이 좋아 하회별신굿을 고스란히 재현해낼 수가 있었다.

"기가 막혔지요. 장날마다 점심 사먹던 풍산장터 묵집 할배가 마지막 탈꾼이었다니요. 할배는 내가 탈춤 추며 옷가지 파는 모습을 보고 '탈을 잘못 만지면 축을 맞아 죽는데…'라며 혼자 걱정했다고 합디다"

이옹을 만나면서 하회가면극회는 활기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잘못된 춤사위가 바로 잡혀지고 무동마당에서부터 주지·백정·할미·파계승·양반·선비·혼례신방마당까지 체계적으로 복원됐다. 지난 78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전, 문화부장관상을 받은 것을 비롯 80년 정부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69호로 지정된뒤 오늘의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가 구성되고 국내는 물론 미국·영국·일본·중국 등 해외에서도 수십차례 공연했다. 그의 탈춤마당은 안동국제탈품 페스티벌의 모체가 됐고, 지난해엔 하회마을을 방문한 영국여왕 앞에서 익살을 떨어 여왕을 미소짓게 했다.

하지만 이씨의 하회탈춤 복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사라진 하회탈을 찾고 있다. 갑자년(1925년), 하회마을 인근 병산마을 사람들이 병산탈굿을 하면서 마을 성황당에 보관중이던 총각탈과 떡다리탈·별채탈 등 3개의 탈을 빌려간뒤 그만 잃어버린 것. 3개의 탈을 다시 찾아내 탈춤마당을 완전 복원, 당시의 양반·선비 등 지배계층과 소작인·중인·상인 등 피지배계층이 하회탈을 중심으로 어떻게 상생의 정신을 살려왔는가를 널리 알리는 것이 이씨의 숙제이다.

30년간 그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은 탈을 닮아서일까. 언제봐도 장난기섞인 웃음기가 줄줄 흐르는 이씨의 얼굴은 그 자체가 하회탈이다. 눈꼬리·입주변·코윤곽 등에 나타나 있는 주름살은 누가 보더라도 익살스러운 하회탈을 빼닮았다. 서른초부터 10여년을 홀아비로 살아온 그는 마흔이 돼서야 지금의 아내 방옥선(48)씨를 만나 2남1녀를 두고 있다. 그의 고군분투 덕분에 이젠 하회탈춤이 국내외적으로 유명해졌고, 밥술걱정도 안하게 됐다. 최근엔 동고동락해온 2명의 탈꾼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돼 그의 기쁨도 남다르다.

"죽을 때까지 탈춤을 출겁니다. 더 나이먹기 전에 하회별신굿탈놀이를 토대로한 모노 드라마를 한 번 해봤으면 하는 꿈도 갖고 있습니다만…"

權東純기자 pinoky@imaeil.com

---하회 별신굿탈놀이 보존회

"하회탈춤을 통해 우리 전통 문화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겠습니다"

지난달 22일 무형문화재 전승보존에 관한 제도개선으로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가 3명으로 늘어 난 중요무형문화재 제 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는 최근 잔칫집 분위기다.

전국 무형문화재 전승보존단체 가운데 예능보유자를 3명이나 배출한 단체는 안동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가 처음. 이번에 문화재청은 백정역 이상호(56)씨에 이어 상쇠 임형규(46)씨와 할미역 김춘택(50)씨를 예능보유자로 지정하고 선비역 권순찬(44), 초랭이역 이규찬(34), 이매역 권태경(41)씨 등 3명도 전수교육보조자로 선정했다.

모두가 하회별신굿탈놀이에 투신, 탈꾼 외길 인생을 살아 온 사람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 온 탈쟁이 이상호씨의 분신들이다. 예능보유자는 한달에 90여만원, 전수교육보조자는 30만원씩의 생계 지원비를 받게 돼 열악하기 짝이 없는 지방 전통문화 전승·보존활동에 다소나마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임형규 보존회장 등 회원들은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려 차세대 청소년들에게 외국 문화에 대한 비판 능력을 높여주고 전통 바탕위에 수입놀이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다짐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