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통일까지 건강하게 살아주오

#최재구씨의 경우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 살테니 언니와 남동생도 그 때까지 건강하게 살아주오"

최재구(65.대구시 달성군 서재리)씨는 6.25전 소식이 끊긴 둘째누나 최봉남(70)씨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가 뜻밖의 만남을 갖고 3박4일동안 한 핏줄의 뜨거운 정을 나눴다. 최씨는 "누나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는데 4일동안 세차례 만나면서 핏줄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며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누나를 보면서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현재 평양의 아파트에서 거주하는 누나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뒤 영화 임꺽정 등에 출연한 등 유명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외동딸 안창순(44)씨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것. 최씨는 "누나가 경북 고령군 우곡면에 있는 부모님 산소를 꼭 찾아보고 싶다고 애원했으나 고향방문이 이뤄지지 않아 크게 아쉬워했다"며 "다음 이산가족 방문에서는 면회소를 통해 누구나 왕래할 수 있고 고향땅도 밟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봉남씨는 지난 15일부터 평양으로 떠나기전까지 서울에 있는 큰언니 봉희(79.서울 강남구)씨와 두 딸, 남동생 재영(63)씨와 재구씨 등의 손을 부여잡고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언니와 가족들이 건강해야 다음에 또 만날 수 있다"며 신신당부했다는 것. 봉남씨는 18일 평양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여객기에 오르기 전 환갑잔치때 찍은 부모님 사진을 두손에 꼭 쥔 채 언니와 남동생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눈물을 훔쳤다. 金炳九기자 kbg@imaeil.com

#김각식씨의 경우

"50년 세월이 너무 무상해. 꽃같던 동생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늙어 있었어"

평양에서 꿈에도 그리던 여동생 김정숙(63)씨를 만나고 돌아온 김각식(71.대구시 달성군 다사읍)씨. "가슴이 미어져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는 김씨는 남동생 김창관(60)씨가 5년전 당뇨병으로 숨을 거뒀다는 여동생의 말을 듣고 '세월을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며 통한의 세월을 원망했다. 김씨는 평양을 떠나면서 여동생 정숙씨에게 받은 유일한 선물인 부모님 사진 1장씩과 조카들의 가족사진을 가슴에 품고 "모쪼록 건강하게 오래만 살아다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여동생에게 당부했다. 김씨는 이번 방문에서 당초 남,여동생의 자녀들을 모두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막상 4일동안 고려호텔에서 여동생 정숙씨만 두차례 만난 것이 너무 아쉬웠다. "두 동생의 자녀들을 3명정도로 생각하고 선물을 준비했는데 여동생이 6남매,남동생이 4남매여서 생면부지의 조카들에게 일일이 선물을 전하지 못해 미안했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씨는 그나마 해방전 돌아가신 아버지와 11년전 숨진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이 모두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군에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여동생 가족과 남동생의 자녀들이 모두 고향땅을 지키고 있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김씨는 "부모님과 남동생의 기일을 알았으니 제사라도 제대로 지내야겠다"며 "고향땅을 밟아 부모님 산소를 찾아보고 조카들을 만날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金炳九기자 kbg@imaeil.com

#최성록씨의 경우

"가슴속에 사무친 한을 조금이라도 풀게 되어 더 없이 기쁘지만 아쉬움도 많이 남아" 50년의 긴 기다림끝에 짧은 평양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최성록(78.대구시 서구 비산1동)씨는 흥분과 회한의 감정을 가누지 못했다. 50년 12월, 핏덩이 같은 자식과 처를 남겨두고 고향을 떠나온 것이 평생 한으로 응어리진 최씨는 이번 상봉에서 곱던 얼굴에 주름만 깊게 팬 아내 유봉녀(75)씨와 훌쩍 커버려 같이 늙어가는 딸 춘화(55), 영희(53)의 모습을 보고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바랬던 당시 생후 1개월의 아들은 죽고 없고, 꿈에도 잊지 못했던 어머니가 지난 77년 아들을 그리며 돌아가셨다는 아내의 말앞에는 속절없이 눈물만 쏟아야 했다. 재가후에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 아내가 한없이 고마워 결혼때 주지 못했던 금반지를 끼워주면서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해야 했다. 최씨는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꿈같은 순간들을 사진기로 소중히 담아왔다.

자신의 사진을 가족들에게 쥐어주며 건강하게 살아서 꼭 다시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뒤로 발걸음을 떼야 했던 최씨, 귀환한 후에는 북쪽 손자들의 재롱을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북녘 하늘을 보는 게 일과로 남았다. 李庚達기자 sarang@imaeil.com

#김창환씨의 경우

"이산의 한을 완전히 달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해"

헤어진 세월의 두께만큼 굵어진 아내의 손을 잡고 다시 생이별의 아픔을 곱씹은 김창환(84.대구시 달서구 월성동)씨는 짧은 북한 방문이 안겨준 회한에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1.4 후퇴때 헤어진 뒤 50여년만에 찾아온 소중한 만남이었지만 기쁨과 슬픔을 함께 가져다 준 세월을 한탄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더 늙어 보이는 아내 피현숙(79)씨와 딸 영애(62), 공장에서 오른손 마디가 잘려나간 큰 아들 영근(58)씨를 보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번에 만나지는 못했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막내 영민(54)이가 살아 있어 한편으로 기뻤다. 유람선을 타고 대동강을 돌 때 고향 땅 평남 대동군 남권면 남정리가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 왔지만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다. 아내와의 꿈같은 신혼 생활과 추억이 서린 곳이지만 눈물을 보이기 싫어 애써 외면 했다. 세자매를 키우느라고 눈물 마저 말라 버린 아내와 불편한 몸으로 딸 여섯을 키우느라 고생하는 큰 아들을 보고 북에서 받은 선물까지 그대로 쥐어주고 내려왔다. 李庚達기자 sarang@imaeil.com

#양원렬씨의 경우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 하더니 북한에서 훌륭한 대학교수가 되어 있었다 』 북한에서 온 남동생 원렬(70)씨를 만난 양용생(75·대구시 수성구 상동 315의8)할머니. 원렬씨를 북한으로 다시 떠나 보내고 18일 오후6시 고속버스 편으로 대구로 돌아온 할머니는 지난 3박4일이 안타깝기만 하다. 동생과의 만남은 할머니가 19살때인 지난 44년 고향인 달성군 가창면 용계동에서 칠곡으로 시집가고, 6.25 전쟁으로 소식이 끊긴지 56년만의 일. 할머니는 『서울대 문리대 재학중 전쟁을 맞아 북한으로 간 동생은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김철주대학에서 수학 교수가 됐다』며『동생이 대구에서 자랄 때의 일을 너무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상봉 기간중인 17일 할머니는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 남동생 문렬(64)씨 내외, 오빠 진렬(82·강원도 강릉시)씨, 언니 점위(78·경남 창원시)씨와 함께 워커힐 호텔에서 어머니의 제사를 모셨다. 이들 가족들은 상봉 기간에 기일(음력 7월17일)이 낀 것을 알고 미리 제사 준비를 했다. 또 제사 전에 케이크를 마련, 원렬씨의 칠순(20일)을 앞당겨 축하했다. 가족들은 또 원렬씨에게 족보와 가족 사진을 전하고, 시계·카메라 등 선물과 현금 1천달러도 전달했다. 원렬씨의 제수 정인혜(60)씨는 『시숙이 조카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일일이 어른을 잘 섬기라고 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金敎盛기자 kgs@imaeil.com

#김치려씨의 경우

"50년만에 만날을땐 더 없이 좋았지만 헤어지기가 너무나 힘들었어"

북에서 내려온 동생 치효(69)씨와 만났던 김치려(74.대구시 북구 태전동)씨의 남쪽 5형제는 18일 끝내 김포공항에 나가지 않았다. 생이별의 아픔이 더할까봐 차마 배웅을 할 수 없었기 때문. 하지만 TV를 통해 동생이 북으로 가는 장면을 보고는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형제들은 김씨의 경기도 분당시 큰 아들집에 머물며 3박 4일간의 꿈같은 시간을 되새기고 있다. 형제들은 동생이 떠나기 하루전인 17일 저녁, 동생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소리내어 한없이 울었다. "지금가면 언제올지 모르니까 건강하게 오래살며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자"며 서로를 위로했다. 김씨는 "상봉 첫날, 헤어질 당시의 19살 동생 얼굴이 너무나 늙어버린 것을 보고 분단의 세월이 너무나 야속했다. 살이라도 좀 쪘으면 좋았을텐데"라고 가슴아파했다. 북에서 온 동생은 혹시나 부모님 산소에 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술과 음식을 준비해왔으나 결국은 호텔방에서 부모님 사진을 놓고 조촐한 제사를 지냈다. 김씨는 "동생이 고향땅과 부모님 산소를 찾고 싶어 했다. 남과 북의 가족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李鍾圭기자 jongk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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