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의 향토사학자 외우(畏友) 송지향(宋志香·83·영주시 풍기읍 서부동)옹. 긴 백발에 하얀 턱수염. 일평생 한국적인 것을 지키며 살아 왔고, 30년 넘게 향토사 연구에 매진해 온 사람이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 송옹은 흰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까지 갖춰입고 꼿꼿한 자세로 맞아주었다. 늘 한복차림을 고집해 이날껏 양복을 걸쳐본 적이 없다고 한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청정한 선비의 체취가 배어나는 송옹을 두고 영주사람들은 '백의현자(白衣賢者)'니 '움직이는 역사책'이라고들 부른다.
"일제 암흑기의 소년시절에 신채호 최남선 정인보 선생들의 글을 통해 나라 잃은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것을 존중하고 잘 지켜나가야 된다고 배운 것이 우리역사와 전통문화 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송옹의 원래 고향은 평북 박천군. 선대들이 500여년동안 그곳서 살다 정감록에 풍기가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내려온 때가 송옹이 12세때인 1929년이었다.
우리 것에 눈뜨기 시작한 청소년기의 그에게 당시 영풍군 순흥에서 살다 이사온 또래 친구의 말은 또하나의 충격을 안겨주었다. 순흥 일대 고분이 도굴돼 유물들이 수레에 실려 나가고 있으며, 회그림(벽화)을 갈아 먹으면 학질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 고분이 망가지고 있다는 것. 어린 마음에도 "이래선 안되는데…"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 이런 안타까움이 훗날 향토사 연구의 싹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정규학교 문턱이라고는 밟아보지 않은 그는 한의사였던 조부와 백부 밑에서 한문과 한의학을 배웠고 독학으로 한약종상 자격증도 땄다. 30대 초반땐 충남 대천에서 한약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성에도 맞지 않고 무엇보다 역사 공부에 대한 미련때문에 2년여만에 그만두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향토사 연구를 시작한 것은 40대이던 60년대 중반쯤. 풍기읍내 고등공민학교(금계중학교 전신)에서 역사와 국어교사로 근무할 당시였다. 옛 향토지와 역사문헌들을 연구하고 유적지 등을 찾아다니며 어릴적 친구 말대로 귀중한 문화유적들이 소멸돼 가는 것을 확인하면서부터이다.
"당시만 해도 향토(지방)사에 대해 무관심한 분위기였습니다. 혹 뜻을 가진 사람이 있다해도 문헌들이 한문으로 돼 이해하기 어려운데다 간략한 자료정도에 그쳐 한계가 있었지요.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향토연구의 길잡이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향토사 발간작업. 5년여 영주 풍기 순흥 일대의 유적을 찾아다니며 문헌을 정리하고 사진을 곁들여 1967년 400여쪽 분량의 '영주향토지'를 발간했다.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초발심의 의욕과 사명감으로 만든 자신의 첫 향토지라 애착이 간다고 했다.
이듬해엔 또하나의 새로운 욕심이 생겼다. 수많은 인재와 전통문화의 보고요, 우리나라 유학의 성지인 안동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향토사를 연구한다 할 수 없기에 '안동향토지'를 펴내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안동군청에서 향토지 편찬위원회를 구성, 집필중이었지요. 객지 사람이 제대로 만들겠느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긴 했으나 한번 해보라고 하더군요"
1년동안 안동을 드나들며 작업하던중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다. 매일 밤 불면증에 시달려 도저히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됐다. 할수없이 교편생활도 그만두고 이후 10여년간 칩거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지독한 불면증도 향토사 연구를 향한 그의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78년부터 다시 안동향토지 발간에 손을 댔다. 10년전 안동군에서 발간하려 했던 향토지가 조판 직전 일부 유지와 문중이 내용에 불만을 품고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를 꼭 이루겠다고 마음먹었다. 자비로 버스를 타거나 걸어다니며 안동지방의 명가나 명현들의 종가와 문화유적 등을 샅샅이 찾아 다녔다. 6년간 자료수집과 정리, 집필 등을 거쳐 마침내 83년에 '안동향토지'(상·하권)를 펴냈다. 이 향토지는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널리 활용되고 있어 송옹에게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고 한다고.
향토사 연구에 불이 붙은 그는 66세때인 지난 84년부터 4년간 옛 문헌을 바탕으로 완벽한 고증과 유적지 답사를 통한 철저한 현장확인으로 영주의 옛날과 오늘을 정리한 사륙배판 1천900여쪽의 '영주·영풍 향토지'(상·하권)를 펴냈다. "출판비가 없어 자칫 무산될뻔 했는데 친지들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빛을 보게 됐지요"
그의 향토지 발간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76세때인 지난 94년엔 순흥지역의 모든 것을 담은 '순흥향토지'를 펴내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도 물론 많았다. "순흥면 배점리와 읍내리 일대 고분들이 도굴되거나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것은 두고두고 애석합니다. 풍기초교 교정에 있던 옛 관아의 문루나 해방 후 영주시 구성공원 부근에 있던 3판서 고택 등이 헐린 것도 안타깝고요"
그는 장수면 화기리 인동장씨 종택의 장말손 선생 영정과 적개공신 교서 등 관련 유물들이 보물로 지정받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죽령 옛 길 복원과 풍기 광복단 기념공원 조성 등의 역사적 고증과 사업추진에도 공헌한 것으로 평가돼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송옹은 인터뷰 내내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구 흉내 내기에 급급해 소중한 우리 유산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짓은 한심스럽고 개탄할 일"이라며 충고를 아끼지 않는 모습에서 외길 선비의 절개를 느끼게 한다.
요즘 송옹은 노령으로 예전같은 활동을 할 수는 없다. 평소엔 집에서 독서하거나 서예를 하고, 1년에 두어번씩 둘째아들 동호씨(부석우체국장)와 함께 젊은 날 답사했던 곳을 다시 찾아가보기도 한다.
"바라기는 그간의 땀의 결실인 향토사 연구와 4권의 향토지가 향토의 역사와 문화연구에 작은 밑거름이나마 되었으면 하는 것 뿐입니다" -김진만기자 factk@imaeil.com
---송지향옹의 향토지
향토지(鄕土誌)는 그 고장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귀중하고 흥미로운 자료이다·우리나라 향토지의 효시는 선조 23년(1590년) 당시 평양감사였던 윤두수에 의해 편찬된 '평양지'이다. 안동의 '영가지'는 '평양지'보다 18년 뒤인 선조41년(1608년) 이 고장 선비 권기에 의해 편찬됐다고 기록돼 있다.
송지향옹이 발간한 '안동향토지'와 '영주·영풍향토지' 등 4권의 향토지는 개인이 철저한 고증과 현장답사, 확인작업 등을 거쳐 향토사를 재조명하고 알기 쉬운 문장으로 다듬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송옹은 꼬박 10년의 준비 끝에 발간한 '안동향토지'(총 1천642쪽), '영주·영풍향토지'(총 1천892쪽)에서 상권에는 옛 안동과 영주의 지역 유래와 지리 인구 자연 고적 풍속 민속 항왜운동 등을 일목요연하게 수록했다. 또 발간 당시 해당 지역의 행정과 산업 경제 선거 교육 종교 등을 총망라해 자료화 했다. 하권에는 씨족별 유래와 연혁, 연대별 인물 등을 수록했다.
'영주·영풍향토지'에서 언론인 고 최석채 선생은 머릿글에 '향토사를 꿰뚫는 사관(史觀)의 기저를 강렬한 향토애와 심판의식에 두고 있다'며 '이 향토지의 완성이 향토의식의 고양에 크게 기여 할 것'이라고 썼다.
이들 4권의 향토지는 이 지역 향토사 연구를 하거나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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