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중국 남경시 율수현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한.중교류사에 가장 우호적 사례로 꼽히는 업적으로 장쑤성 인민정부의 협조를 얻어 우리나라 사람의 동상이 세워진 것. 주인공은 다름아닌 신라인 최치원이었다. 또한 그곳에서는 최치원을 기리는 탑과 최치원박물관 건립공사가 한창이다.
중국인들은 왜 1100년전 신라인을 잊지 못할까. 이번 주 KBS 1TV '역사스페셜'은 25일 오후 8시 중국 현지 취재와 사서 등을 통해 국내외에서 큰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1100년전 신라 유학생 최치원에 대해 입체 분석한 '천재시인 최치원은 조기유학생이었다'를 방송한다.
중국 남경인근에서 전해지는 전설 가운데 '쌍녀분기'란 것이 있다. 최치원이 율수현위라는 벼슬을 지낼때 억울하게 죽은 두 여인의 무덤에 시를 지어 올린후 어느 날 그 두 여인과 시를 주고 받으며 하룻밤을 보냈다는 전설이다. 그런데 최근 전설로만 여겨졌던 그 이야기속의 무덤이 남경인근에서 확인됐다. 또 하나의 충격적인 명문이 바로 잘 알려진 '토황소격문'으로 유학시절 최치원이 '황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도적 괴수 황소에게 보냈던 문장이다. 황소가 이 격문을 보고 놀라 걸상에서 떨어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에 대한 당시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문장으로 중국을 꿰뚫었다'는 최치원에 얽힌 이야기는 이외에도 너무도 많다. 그가 중국 유학길에 오른 것은 불과 12세때였다. 이같이 어린 나이에 유학길에 오른 것은 당시 6두품 집안의 한계성 때문.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였다. 그는 '인백기천'(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는 뜻)이란 말을 남겼고 성공한 유학생이 됐다.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명문장가가 된 최치원은 20대 후반 개혁을 꿈꾸며 귀국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 신라. 그는 왕에게 시무 10조 등 민본의 사회개혁안들을 계속적으로 올리며 신라의 회생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개혁의지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개혁의지는 훗날 새로운 왕조, 고려의 통치이념으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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